① 신라 승려 관성(觀成)의 연분(鉛粉)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프롤로그 

2019년 10월 16일, 우리나라 화장품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세미나가 열렸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개최한 ‘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Cosmetics and Makeup Culture of the Joseon Court in the 18th Century’라는 국제세미나였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주요 내용은 사도세자의 친누나였던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년) 무덤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화장품에 대한 것이었다. (더케이뷰티사이언스 2019년 12월호(vol. 12)에 자세한 기사가 있다) 세미나를 듣던 중 조선시대, 아니 그 이전에 우리나라 화장품의 역사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날의 세미나는 나를 화장품 역사에 푹 빠지게 했다. 우리나라 화장품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전 태평양 박물관 관장이었던 전완길 선생님의 책『한국화장문화사韓國化粧文化史』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자꾸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완길 선생님은 2002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저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디지털 도서관 검색을 통해 사료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역사 관련 비전공자이고, 전문가의 감수도 받을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지난 3년간 나의 ‘연구(?)’ 결과물을 조심스럽게 공유한다. 많은 오류와 미숙함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화장품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측면에서 너그러운 이해와 함께 열린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이 글에 대한 오류 지적이나 사료史料 제공은 언제나 환영한다.

 

최초의 ‘K뷰티’(?) 

“신라시대에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기술이 상당하였다. 한 승려가 692년(효소왕 1년)에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었으므로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에서 692년 이전에 연분의 제조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연분: 납으로 만든 가루로 피부를 하얗게 해 주는 화장품 

1987년 열화당에서 간행된 전완길 선생님의 책 『한국화장문화사韓國化粧文化史』에 나오는 문구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은 도대체 그 신라 승려는 누구였고, 어떤 상을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1980년대와 달리 디지털 도서관을 통해 과거 사료 검색이 자유롭다. 특히, 한국사와 관련된 일본 및 중국측 기록에 대해서는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http://contents.nahf. or.kr/)를 통해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와세다대학교 전자도서관을 통해 『일본서기』 원본 이미지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이렇게 수월하게 과거 사료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지만, 전완길 선생님은 어떻게 그 많은 자료를 다 모았는지 새삼 존경스럽다. 

『일본서기』 지토 6년 (692년) 윤 5월 4일 ⓒ와세다대학교 전자도서관
『일본서기』 지토 6년 (692년) 윤 5월 4일 ⓒ와세다대학교 전자도서관

『일본서기』 지토 6년(692년) 윤 5월 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글에 대한 국문번역은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확인했다. 

692년 윤 5월 4일, 당시 일본 국왕 지토는 승려 관성觀成이 만든 연분鉛粉을 칭찬하면서 비단, 명주솜, 그리고 삼베와 같은 상을 내렸다. 역사기록을 통해 당시 연분鉛粉이라는 화장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궁금했던 것은 다음의 3가지였다. 

1) 관성觀成이라는 승려는 누구일까? 

2) 연분이 어떤 것이길래 왕이 상을 내릴 정도였을까? 

3) 연분을 선물받은 일왕 지토는 누구인가? 

먼저 승려 관성觀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결과물을 찾아보았다. 구글과 야후재팬 검색을 통해 많은 연구문헌을 찾을 수 있었고, 한국과 일본학자들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관성觀成의 국적 

일본서기 684년 음력 4월 20일 기록에는 신라로 떠나는 두 명의 일본 사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684년 음력 4월 20일 두 명의 사신 高向臣麻呂과 都努臣牛甘를 신라에 보냈다.” 

그리고, 1년 후인 685년 음력 5월 26일, 두 명의 일본사신이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특이한 점은 684년 신라로 파견되었을 때의 사신 이름은 각각 高向臣麻呂과 都努臣牛甘이었다. 

그런데,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들 사신의 이름은 각각 高向朝臣麻呂과 都努朝臣牛飼로 바뀐다. 

1년 사이에 사신들의 이름에 각각 아침 조가 들어가는 식으로 개명이 된 것이다. 실제로 예전 일본사람들은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거나 또는 윗사람의 호의나 지시에 의해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빈번했다. 

『일본서기』 덴무 13년 (684년) 음력 4월 20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https://db.history.go.kr)
『일본서기』 덴무 13년 (684년) 음력 4월 20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https://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검색한 일본서기 덴무 14년(685년) 음력 5월 26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검색한 일본서기 덴무 14년(685년) 음력 5월 26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편, 이들은 귀국하면서 신라왕으로부터 말, 개, 앵무새, 그리고 까치 등 여러 선물을 받았다. 또한, 이들과 함께 학문승인 관상観常과 영관靈觀이 사신들을 따라 일본에 왔다. 역사서에 승려 관상観常이 등장하는 첫 기록이 바로 이 685년의 기록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명의 사신은 신라에서 돌아왔으며至自新羅, 두 명의 학문승은 사신들을 따라왔다從至之. 사신들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고, 학문승인 관상観常과 영관靈觀은 이들을 따라온 것이다. 뭔가 표현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역사학자들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먼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신라의 학문승이 일본 사신을 따라 일본에 파견된 것으로 해석을 한다. 즉, 승려 관상観常과 승려 관성觀成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다.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 사이 학문승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다. 물론, 당나라 유학을 위해 잠시 신라를 경유한 경우도 있었지만, 애초에 신라로 유학을 온 경우도 많이 있었다. 박균섭의 논문에 따르면, 7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 사이의 활발한 학문승 교류 현황을 볼 수 있다. 

또한, 1965년 출판된 일본문헌에서는 승려 관상観常과 승려 관성觀成을 동일인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당나라 유학 후 신라에 머물던 일본인 승려 또는 신라로 유학간 일본인 승려가 사신들을 따라 함께 귀국했다고 해석한다. 

하나의 문장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가지 해석을 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신라인 승려이건 또는 신라로 유학을 왔던 일본인 승려 이건 신라에서 공부를 한 것은 맞을 것이다. 

박균섭, 일본 학문승의 신라 유학에 관한 교육사적 고찰 ⓒ『일본학보』 제65호 2권 (2005.11)
박균섭, 일본 학문승의 신라 유학에 관한 교육사적 고찰 ⓒ『일본학보』 제65호 2권 (2005.11)

또한, 여기에 나오는 승려 관상観常이 앞서 언급한 승려 관성觀成과 동일인물인지도 궁금하다. 승려 관성觀成은 연분鉛粉을 만들어 상까지 받은 인물로 단순한 승려가 아닌 기술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만약 이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면 신라의 연분 기술이 일본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1971년 일본 색재협회지 논문에서 廣瀬 誠一는 승려 관성観成을 신라 출신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증거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65년 일본 연구자들의 승려 관상観常과 승려 관성觀成에 대한 동일 인물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역시 승려 관성観成의 국적문제는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일치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물론, 한 쪽이 맞고 다른 쪽은 틀렸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묘미이면서 동시에 어려운 점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승려 관성観成은 712년 대승도라는 높은 지위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그가 학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단한 승려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 ⓒ『色材協会誌』 44巻(1971) 7号
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 ⓒ『色材協会誌』 44巻(1971) 7号
불교정책으로서의 계사초청 일본학술지『 인도학불교학연구』 제47권 제2호, 1999년 3월.
불교정책으로서의 계사초청 일본학술지『 인도학불교학연구』 제47권 제2호, 1999년 3월.

 

연분鉛粉의 가치 

승려 관성観成이 헌상한 연분을 받은 당시 일왕은 지토持統 여왕이었다. 645년생인 그녀가 연분을 선물받았던 692년 당시 나이는 만 47세였다. 만 47세의 여인에게 연분, 즉 화장품의 가치는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서에 연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 연구문헌에 따르면, 일본서기 등 오래된 일본 역사기록 가운데 화장품 관련 기사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것은 승려 관성이 만든 연분기술이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하고 귀중했기 때문에 역사서에까지 등재된 것이 아닐까하는 그들 나름의 조심스러운 의견도 개진되어 있다. 

 

일왕 지토持統

승려 관성観成이 선물한 연분을 받은 당시 일왕은 앞서 말한대로 여왕이었던 지토持統이다. 그녀는 전임 41대 일왕이었던 텐무(天武, ?-686)의 부인이었다. 지토는 남편 사후 4년 뒤인 690년 일왕에 즉위하여 697년까지 일본을 다스렸다. 

승려 관성의 연분이 역사서에 등재된 이유를 설명하는 일본측 문헌자료(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왼쪽) ⓒ『色材協会誌』 44巻(1971) 7号)와 에도 시대에 그려진 남자 옷을 입은 일왕 지토 ⓒ跡見学園女子大学図書館 소장자료.
승려 관성의 연분이 역사서에 등재된 이유를 설명하는 일본측 문헌자료(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왼쪽) ⓒ『色材協会誌』 44巻(1971) 7号)와 에도 시대에 그려진 남자 옷을 입은 일왕 지토 ⓒ跡見学園女子大学図書館 소장자료.

 

최초의 K뷰티는 연분? 

삼국시대에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 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은 일본에 채색과 종이, 그리고 먹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전했고,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이었던 연자방아 기술도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키는 2005년 9월 16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에서 ‘구다라(百濟)’의 어원 설명을 하면서 일본에 전래된 백제문화의 영향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럼, 승려 관성觀成의 연분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일본 사신을 따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승려 관상観常과 일왕 지토에게 연분을 헌상하여 상을 받은 승려 관성觀成은 위에서 언급한 한일 양국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승려 관성観成의 국적 논란은 아직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신라 승려이던 또는 신라 유학생 출신의 일본 승려이던 신라 화장품 기술이 일본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 사료 기록이나 유물과 같은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일본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고대 일본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서 유일한 화장품 기록은 바로 692년의 승려 관성觀成에 의한 연분 헌상 기사이다. 즉, 그 이전에 연분 또는 화장품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따르면, 귀인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화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분을 바를 정도로 화장문화가 발달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문무왕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혼인하여 문무왕을 낳았다.” 문희의 미모에 대한 내용도 소개되었다. 옅은 화장만으로도 문희의 미모가 대단했다는 내용이다. 

淡糚輕服, 光艶炤人

옅은 화장淡糚에 가벼운 옷을 입었는데輕服, 빛나는 아름다움이 환하게 비추었다. 

최근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K뷰티 바람을 어느 일방의 기술적 우위성과 
다른 일방의 무조건적인 문화수용으로 해석한다면, K뷰티의 흥행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두 나라 사이의 오랜 문물 교류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는 등의 
서로에 대한 조심스러운 이해가 더 필요하다
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 ⓒ『色材協会誌』 44巻 (1971) 7号
선사시대 및 원사시대의 안료와 염료 ⓒ『色材協会誌』 44巻 (1971) 7号
문희의 미모가 소개된 기사 (정덕본, 1512) ⓒ『삼국사기』
문희의 미모가 소개된 기사 (정덕본, 1512) ⓒ『삼국사기』
문희의 미모가 소개된 기사 (정덕본, 1512) ⓒ『삼국사기』
문희의 미모가 소개된 기사 (정덕본, 1512) ⓒ『삼국사기』

 

마치며 

최근 일본에서는 다시 한류바람이 불면서 K뷰티 역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승려 관성觀成의 연분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K뷰티는 ‘승려 관성觀成의 연분鉛粉’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지만,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사료 수집 과정에서 한·일 역사학자들의 치열한 논쟁을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역사 비전공자의 한계도 실감하게 되었다. 

이 글은 과거에 우리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었다고 자랑을 하거나 문화우위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교류가 있었고, 이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실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올바로 규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지금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K뷰티 바람을 어느 일방의 기술적 우위성과 다른 일방의 무조건적인 문화수용으로 해석한다면, K뷰티의 흥행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두 나라 사이의 오랜 문물 교류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는 등의 서로에 대한 조심스러운 이해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저작권자 © THE K BEAUTY SCIEN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