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근대 화장품의 출발 ‘박가분(朴家粉)’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1897년 4월 15일자 독립신문에는 인도산 사향(麝香)과 향수에 대한 광고가 게재되었다. 프랑스산 제품임을 강조한 이 내용은 서울 진고개(현재 충무로2가, 명동성당의 남쪽)에 위치한 일본계 회사 ‘구마모도’의 광고이다. 이 화장품 광고를 통해 우리는 당시 화장품의 인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화장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화장은 부인의 생명 

1919년 매일신보 신년호에는 당시 경성미용원장인 현희운(1891~1965) 씨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는 문명이 날로 발달하고 생활이 점점 복잡하여 남녀의 교제가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외모를 꾸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조선은 예로부터 선조의 혼령에 향을 피우고, 목욕재계와 새 옷을 입는 문화가 있었지만, 그 외 위생에 대한 관념이 적고, 화장기술이 부족하며, 게다가 좋지 못한 화장품 사용의 폐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외국산 화장품을 사용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제품들은 우리의 피부에 맞지 않거나 또는 우리의 습관이나 우리의 미의 표준과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 맞는 미용술과 화장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우리 피부에 적합한 국내산 화장품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1897년 4월 15일자 독립신문의 화장품 광고.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되었다.
1897년 4월 15일자 독립신문의 화장품 광고.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되었다.

 

최초의 국내산 화장품 박가분(朴家粉)’ 

우리 피부에 맞는 국내산 화장품의 필요성은 근대적인 의미의 화장품 개발을 요구하게 되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국내산 화장품은 무엇일까? 근대적인 화장품이란 전문적인 연구개발과 대량 생산, 그리고 유통판매와 홍보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의 화장품기업 제품개발 프로세스와 조직 구조가 비슷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최초의 국내산 화장품은 아마도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의 ‘박가분(朴家粉)’이 아닐까 한다. 박승직(1864~1950)은 두산그룹의 창업주로 1896년 서울의 배오개(현재 종로4가)에 박승직상점을 개업하였다. 배오개 시장은 조선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손꼽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현재 광장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처음 박승직상점은 포목(布木, 베와 무명)을 판매하는 가게로 대부분의 고객들은 여성들이었다. 이때,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鄭貞淑)은 고객 판촉물로 화장분(粉)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판촉물인 화장분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15년 이것을 정식으로 상품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부업 수준으로 시작하였지만, 방물장수를 통해 판로가 개척되면서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1919년 8월 4일에는 ‘박가분’ 상표권이 등록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의 화장, 화장은 부인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기사 ⓒ매일신보
1919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의 화장, 화장은 부인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기사 ⓒ매일신보

1920년 박승직 일가는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현재 두산아트센터)에 가옥을 신축하고, 같은 곳에 화장품 공장을 설립한다. 또한, 이 해 조선 총독부 식산국으로부터 화장품 제조등록 1호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또한, 박승직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로 재편되었다. 박승직상점은 한 때 여직공만 30여명을 고용할 정도로 박가분은 당시 엄청난 인기 화장품이었다. 박가분은 전통 화장분 백분(白粉)의 소재인 쌀가루, 보릿가루, 조개를 태운 가루 등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루들은 피부 부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납을 식초로 처리한 다음 가열 및 건조하여 얻어지는 납가루를 추가로 배합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분을 네모난 덩어리로 건조시킨 후, 종이에 싸서 포장을 했다. 또한, 포장지 겉면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넣어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박가분의 인기는 거침이 없었다. 

1921년 1월 24일자 매일신보에는 ‘화장품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박가분에 대한 특집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날 기사에서는 박가분의 안전성과 효능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1922년 2월 16일자 매일신보에서는 히트상품인 박가분 소식을 전하면서 높은 수요로 인하여 제조하기에도 어렵다는 상황을 소개하였다. 이 기사로부터 당시 박가분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겠다. 

1934년 2층으로 증축해 새로 단장한 박승직상점(사진 왼쪽)과 창업주 박승직과 부인 정정숙 여사 ⓒ두산 헤리티지 1896
1934년 2층으로 증축해 새로 단장한 박승직상점(사진 왼쪽)과 창업주 박승직과 부인 정정숙 여사 ⓒ두산 헤리티지 1896

박가분은 계속된 인기에 힘입어 좀 더 공격적인 홍보전략을 수립하였다. 기존에는 언론기사를 통한 간접적인 광고가 대부분이었지만, 신문의 지면을 통한 공격적인 광고를 시작한 것이다. 1923년 6월 27일자 동아일보 광고에서 박가분은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제품 광고를 소개하였다. 

“박가분을 항상 바르면 주근깨와 여드름이 없어지 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 

100년 전의 이 광고문구는 현재의 화장품표시광고 가이드라인 기준에 부합할 수 있을까? 화장품표시 광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위의 문구를 판단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근깨와 여드름에 대한 표현은 각각 미백개선 기능성 및 여드름성 피부완화 기능성화장품일 때에만 표현이 가능하다. 또한, 잡티는 미백기능성 화장품이면서 잡티개선에 대한 인체적용시험을 통한 효능입증 자료가 있어야만 위와 같은 표기가 가능하다. 또한, ‘없어지고’와 ‘없어져서’라는 문구는 그 표현 자체가 완곡한 의미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으로 활용하기 어렵고, ‘~도움을 준다’ 정도로 수정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화장품 표시광고에 대한 기준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이 광고문구는 큰 문제없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최초의 국내산 근대 화장품 ‘박가분’ ⓒ대전시립박물관
최초의 국내산 근대 화장품 ‘박가분’ ⓒ대전시립박물관
박가분(朴家粉)의 상표등록증 ⓒ두산 헤리티지 1896
박가분(朴家粉)의 상표등록증 ⓒ두산 헤리티지 1896
화장품의 복음-여자의 화장품 중 특히 얼굴에 바르는 분은 위생과 밑화장의 관계로 인하여 쓰는 자도 조심하고, 제조하는 자도 역시 조심을 해야한다. -아는바만큼 이렇게 분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자 정도로 아는 것은 아니고, 또 그 효험이 다소 없음은 안다.-그러한대 요사이 실제로 여러가지 분을 사서 써본 자의 실험한 말을 들어보면 여러가지 분 중 경성 연지동 270번지에서 제조 발매하는 박가분이 제일 좋다하니 분을 사서 쓰는 이는 이 박가분을 한 번 사서 시험을 할 만한 일이라더라. (매일신보 1921년 1월 24일)
화장품의 복음-여자의 화장품 중 특히 얼굴에 바르는 분은 위생과 밑화장의 관계로 인하여 쓰는 자도 조심하고, 제조하는 자도 역시 조심을 해야한다. -아는바만큼 이렇게 분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자 정도로 아는 것은 아니고, 또 그 효험이 다소 없음은 안다.-그러한대 요사이 실제로 여러가지 분을 사서 써본 자의 실험한 말을 들어보면 여러가지 분 중 경성 연지동 270번지에서 제조 발매하는 박가분이 제일 좋다하니 분을 사서 쓰는 이는 이 박가분을 한 번 사서 시험을 할 만한 일이라더라. (매일신보 1921년 1월 24일)

한편, 이 광고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박가분이 경성생산품품평회 심사장인 공학박사 미야마기사부로(三山喜三郞)의 상을 받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제품의 기술력을 어필하기에는 대외 수상 이력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또한, 제품의 제조원과 판매원이 별도임을 알 수 있다. 신문광고에 의하면, 박가분의 제조원은 경성 연지동 270번지에 위치한 박가분제조급발매소(朴家粉製造及發賣所)이고, 판매원은 경성 종로4가 15번지에 위치한 박승직상점이었다. 두 회사 모두 박승직이 세운 회사였지만, 제조와 판매의 역할을 상이하게 구분한 것이다. 

한편, 박가분의 매출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1930년 7월 5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당시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인 조선인 중심의 북촌상권(종로 등)과 남쪽인 일본인 중심의 남촌상권(명동 등)으로 나뉘어졌다. 이 날 기사에 따르면, 박승직상점은 1929년 매출 35만원으로 북촌의 주요 상점 중 매출 5등이었다. 

참고로 북촌 최고의 매출은 김희준상점으로 170만원, 남촌 최고의 매출은 미츠코시 백화점으로 260만원이었다. 2011년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발행한 경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의 1원은 2009년 기준 대략 6294원의 가치라고 하였다. 이 자료에 근거하여 1929년의 대략적인 박승직상점의 매출을 현재가치로 추산하면, 대략 22억원 정도이다. 박승직상점은 박가분 이외에도 포목 등 다양한 잡화를 취급했기 때문에 박가분의 정확한 매출은 알 수 없다. 다만, 매출의 1/3을 박가분이라고 가정할 경우, 1929년 박가분 매출의 현재가치는 대략 7억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당시와 지금의 물가수준, 구매력 등 경제지표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의미인지 아는 것은 매우 힘들다. 

 

1920년대, 분(粉) 화장을 둘러싼 3인 3색의 미용법 

박가분의 출시는 당시 많은 여성들의 화장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여인들의 화장법과 화장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가 있다. 1927년 2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매일신보에 서는 ‘나의 화장법’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여성 3인의 화장법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한다. 이 3인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당시에는 진한 메이크업 보다는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피부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아예 메이크업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27일
ⓒ동아일보 1923년 6월 27일

 

1)비누와 분을 혼합한 세수, 천연의 미를 그대로(황인덕 여사) 

1927년 2월 17일자 매일신보에 소개된 황인덕(黃仁德) 여사의 미용법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이화학교(현 이화여대) 출신으로 세 아들을 키우는 가정주부이다. 그녀의 남편은 당시 구미 농업과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온 방태영(方台榮, 1885~1955)이다. 명문 여학교를 졸업하고, 남편 또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해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화장법은 매우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거의 화장을 안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화장은 얼굴의 자연미를 훼손하여 금지시켰기 때문에 화장을 일절 안한다고 하였다. 신여성인 그녀가 남편의 말을 듣고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인터뷰 말미에서 그녀는 외출을 할 때에는 팥비누와 조선분을 혼합하여 세수를 한다고 나름의 미용법을 소개하였다. 

황인덕(사진 맨 오른쪽) 여사의 가족사진 ⓒ매일신보 1926년 5월 26일.
황인덕(사진 맨 오른쪽) 여사의 가족사진 ⓒ매일신보 1926년 5월 26일.

 

2)화장수를 쓰면 심신이 상쾌, 연백분은 너무 진해(김미자 여사) 

황인덕 여사의 화장법 관련 기사 아래에는 김미자(金美子) 여사의 화장법이 소개되었다. 그녀는 당시 경성 최고의 여자고등학교인 경성제일고등여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화장법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가루분을 사용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조선분이나 연백분은 너무 진해서 사용하지 않고, 대개 가루분을 쓴다고 하였다. 또한, 겨울에는 크림을 바르고, 여름에는 마사지 크림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머리에는 대체로 춘유(참죽나무 오일)를 쓰고, 세안후에는 화장수를 바른다고 하였다. 김미자 여사가 말한 진한 연백분 대신 가루분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마치 너무 진한 메이크업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메이크업을 더 선호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화장법’ 김미자 여사 ⓒ매일신보 1927년 2월 17일
‘나의 화장법’ 김미자 여사 ⓒ매일신보 1927년 2월 17일

 

3)건실한 화장, 필요없는 것은 안한다(이망야 여사) 

1927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는 당시 경성 최고의 유명인이었던 이망야 여사의 ‘나의 화장법’에 대한 기사가 소개되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찬물을 수건에 적셔 얼굴을 닦는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비누에는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 NaOH)가 남아 있어 얼굴을 트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신은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원래 얼굴이 희고 곱기 때문에 분이나 크림 따위는 잘 바르지 않는다고 소개하였다. 심지어 외출을 할 때에도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한 번 씻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인터뷰에 대해 당시 기자는 이망야 여사의 화장법은 쓸데없는 사치를 피하고 순전히 필요한 것만 하는 것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망야 여사는 의학박사 이성용씨의 부인으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셀럽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성용은 세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독일 유학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 대단한 뉴스였고, 실제로 1921년 9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에 소개되었다. 그 후 4년이 지난 1925년 11월 22일 시대일보에는 의학박사 이성용과 그의 독일인 부인의 귀국 소식이 실린다. 이성용 박사는 독일 바덴의 프라이부르그 대학교에서 1924년 세균학으로 의학박사를 받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연구를 하던 중 1924년 11월 체코 보헤미아 출신의 이망야 여사와 결혼을 한 것이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 이망야 여사는 이국적인 외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성용 박사와 이망야 여사의 귀국 소식이 실린 기사 ⓒ시대일보 1925년 11월 22일
이성용 박사와 이망야 여사의 귀국 소식이 실린 기사 ⓒ시대일보 1925년 11월 22일

 

박가분의 위기, 짝퉁 제품의 출현 

1920~1930년대 경성의 화장품시장을 주름잡던 박가분에 위기가 닥쳐온다. 먼저, 박가분의 인기에 편승하여 짝퉁 제품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1934년 7월 14일자 매일신보에는 짝퉁 박가분과 관련된 소송 내용이 나온다. 박승직은 오상용이 1932년부터 박가분의 상표를 무단으로 사용하였고, 심지어 박가분 본점의 전화번호, 주소 및 이름까지 멋대로 사용하여 마치 박가분 대구출장소로 가장한 모조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박승직은 오상용이 이 모조품을 대구와 경상도 일대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득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승직은 사전에 여러 번 경고를 하였으나, 오상용이 이러한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1933년 9월 대구경찰서에 형사고소를 제기하였다. 다행히 오상용은 같은 해 10월 사죄광고를 하면서 박승직은 일단 고소를 취하하였다. 그런데, 한 달 후 오상용은 다시 무단으로 박가분의 상표를 사용하였고, 이에 박승직은 다시 형사고소를 하게 된다. 박승직은 오상용의 상표권 무단사용으로 인해 약 만원 정도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금액의 현재가치는 2006년 한국은행 보고서 기준으로 추산하면 대략 6300만원 정도이다. 하지만, 금전적인 손해보다 박승직을 더 화나게 한 것은 경상도 일원에서 박가분의 신용이 나빠진 것이다. 당시 경성에서 박가분의 인기가 너무 높은 나머지 지방에서는 짝퉁이 판칠 정도로 박가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박가분은 이 짝퉁사건으로 인해 브랜드의 신뢰도에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짝퉁 박가분에 대한 형사고소 기사 ⓒ매일신보 1934년 7월 14일
짝퉁 박가분에 대한 형사고소 기사 ⓒ매일신보 1934년 7월 14일
미소노의 무연백분 제품과 광고 ⓒ경성일보 1930년 5월 1일
미소노의 무연백분 제품과 광고 ⓒ경성일보 1930년 5월 1일

 

박가분의 위기, 안전성 이슈 

짝퉁 제품에 이어 박가분에는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박가분에 함유된 ‘납’을 둘러싼 화장품의 안전성 논란이었다. 박가분은 쌀가루, 보릿가루, 조개 등을 태운 가루에 피부 부착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납가루를 혼용하여 만든 제품이었다. 전통화장품인 가루분(粉)에 납이 사용된 것은 화협옹주묘에서 발굴된 화장품의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다. 2019년 10월 16일 국립고궁 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 국제세미나에서 국립고궁박물관 김효윤 연구사는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 보존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서는 화협옹주 화장품 내용물 중 백색가루에 탄산납이 포함되었다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당시 가루분의 피부 부착성 향상을 위해 납이 사용된 것 같다. 19세기 말 일본에서도 납 화장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887년 유명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후쿠스케가 공연 도중 납 중독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일본국회도서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납이 들어간 화장품에 대한 안전성 이슈가 제기되었지만, 제품의 인기가 너무 높았고 대체제도 없어서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1935년 납으로 된 백분 판매가 중지되었다( 『화장(化粧)의 일본사』). 

화장품에 함유된 납의 위험성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시리즈 기사 ①1930년 10월 16일 ②1932년 3월 8일 ③1933년 12월 2일 ⓒ동아일보
화장품에 함유된 납의 위험성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시리즈 기사 ①1930년 10월 16일 ②1932년 3월 8일 ③1933년 12월 2일 ⓒ동아일보

같은 시기, 일제강점기하의 조선에서도 화장품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납이 들어간 박가분으로 인해 피부가 상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화장품 기술이 좋았던 일본에서는 미소노(御園)라는 회사에서 납이 들어가지 않은 무연백분이 출시되었고, 이 제품은 조선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또한, 1930년대 언론에서는 화장품의 안전성과 관련된 많은 기사를 쏟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화장품에 함유된 납의 유해성에 대한 기사들은 시장에서 박가분의 입지를 점점 좁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박가분 공장 화재 기사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7일
박가분 공장 화재 기사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7일

박가분의 위기, 공장화재 

화장품 중 납에 대한 안전성 이슈로 박가분의 아성이 흔들릴 무렵, 박가분에는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온다. 1935년 5월 26일 박가분을 제조하는 본점 점포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는 5월 26일 오전 10시 20분경, 제조공장의 제분건조실에서 발생하였다. 소방대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점포 1동 3칸을 모두 태워버리는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50원 가량의 손해가 발생한다. 이 금액의 현재가치는 2006년 한국은행 보고서 기준으로 추산하면 대략 31만원 정도이다. 현재 화폐가치 기준으로 본다면, 큰 손해는 아니겠지만, 공장화재라는 측면에서 박가분에는 치명적인 피해일 수밖에 없다. 제품의 안전성 이슈와 공장의 화재는 박가분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박가분의 폐업 

연이은 악재에 힘들어 하던 박가분은 결국 1937년 시장에서 철수하게 된다. 공장의 화재와 제품의 안전성 이슈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는 박가분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던 것 같다. 최초의 국내산 근대화장품 박가분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박가분이 K-뷰티 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100여년 전에 단종된 제품이었지만, 대량생산과 연구개발, 신문 등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와 제조-판매를 분리한 경영방식 등 최초의 국내산 근대 화장품 박가분은 K-뷰티의 역사속에서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REFERENCES

- 독립신문 

- 매일신보

- 광고, 시대를 읽다(한국문화사20), 국사편찬위원회 (2007).

- 고종식, 박승직 상점의 창업과 두산그룹의 성장요인으로서 박승직의 경영이념, 경영사학, 

제30집 제1호(통권 73호) 35-54 (2015) 

- 두산 헤리티지 1896 (https://www.doosanheritage1896.com/kr/collect)

- 대전시립박물관

- 매일신보

- 경제분석보고서, 한국은행 경제연구원(2011)

- 동아일보

- 시대일보

- 일본국회도서관(https://www.ndl.go.jp/france/en/part1/s2_2.html)

- 야마무라 히로미 著, 강태웅 譯, 화장(化粧)의 일본사, 서해문집(2019)

- 조선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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