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세종대왕 며느리의 온천사랑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추운 겨울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휴양지는 아마 도 따뜻한 온천일 것 같다. 온천욕은 피부건강과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예로부터 많은 인기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온천’과 ‘목욕’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국역 기준으로 각각 813개와 1155개의 기록이 나온다. 그 중 세종(재위 1418~1450), 세조(재위 1455~1468), 그리고 현종(재위 1659~1674)시대에 유난히 많이 검색되는 것이 이채롭다. 세 국왕의 재위기간은 각각 32년, 13년, 그리고 15년으로 모두 다르다. ‘온천’과 ‘목욕’의 검색수를 이들의 재위기간으로 나눠보았다. 그 결과, ‘온천’은 세종(3.2건), 세조(2.1건) 및 현종(9.4건)이었고, ‘목욕’은 세종(5.2건), 세조(5.4건) 및 현종(5.9건)이었다. 이 세 분의 왕들은 모두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것으로 익히 알려졌다. 따라서, 이들의 온천욕은 어쩌면 조선왕실의 특별한 피부건강 치료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온천 또는 목욕으로 검색된 모든 기록들이 왕 또는 왕실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실록에는 일반백성들과 관리들에 대한 온천 또는 목욕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 기록의 대부분이 왕과 왕실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조선왕실의 온천사랑은 분명히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조선왕실 사람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종대왕 며느리인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못말리는 온천사랑 에피소드에 대해 소개한다. 

세종(1397~1450)과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 사이에는 8남 2녀의 자식들이 있었다. 장자는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 차남은 계유정난(1453)의 주인공으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이다. 광평대군 이여李璵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5남으로 1425년 출생하였다. 그는 1432년 8세의 나이로 광평대군에 봉해졌고, 1436년 12세의 나이에 동지중추부사 신자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창진瘡疹(천연두)에 걸려 1444년 12월 8일 불과 20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실록에 있는 광평대군 졸기卒記(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 또는 자신의 평가를 서술하는 것)에 따르면,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경서에 통달하였으며, 글씨는 물론 활쏘기와 격구에 능한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왕자였다. 또한, 아름다운 용모에 아랫사람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꾸짖지 아니하는 등 너그러운 성품과 넓은 도량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런 광평대군의 이른 죽음은 세종과 소헌왕후를 매우 슬프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온천’과 ‘목욕’ 검색어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온천’과 ‘목욕’ 검색어 기록.
조선시대 국왕별 연평균 ‘온천’(왼쪽)과 ‘목욕’ 검색횟수 (조선왕조실록, 재위 10년 이상).
조선시대 국왕별 연평균 ‘온천’(왼쪽)과 ‘목욕’ 검색횟수 (조선왕조실록, 재위 10년 이상).

광평대군은 부인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의 사이에서 외아들인 영순군 이부李溥, 1444~1470를 얻었다.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생몰년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연산군 2년(1496년) 왕이 경기도 광주廣州의 둔전屯田(군사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을 내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부인 신씨가 광평대군과 동갑인 1425년생이라면 최소한 72세까지 장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444년 광평대군 사망 이후, 부인 신씨와 그의 어린 아들인 영순군 이부는 세종과 문종의 많은 배려를 받았다. 특히, 문종은 영순군을 궁중에 들여 세자(후의 단종)와 함께 글을 읽게 하는 등 남다른 보살핌을 베풀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평대군 부인 신씨는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조정신료로부터 많은 비난을 사게 된다. 먼저, 문종 1년(1451년) 토당동(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서 벌인 그녀의 불사佛事는 많은 신하들의 비난을 야기하였다. 아무리 지체 높은 왕실여인이라도 유교 국가에서 불사를 벌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국왕인 문종의 중재로 이 문제는 잘 넘어갔지만, 이후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온천여행은 조선사회를 한바탕 요동치게 한다.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소재 광평대군과 부인 평산신씨의 묘(촬영연도 2015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소재 광평대군과 부인 평산신씨의 묘(촬영연도 2015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불사佛事의 일로 조정신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던 광평대군 부인 신씨가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불과 2년후인 1453년이다. 단종 1년(1453년) 4월 24일, 사인舍人(의정부 정4품의 관직) 이예장은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부인 신씨가 동래온천에 여러달 머무는 탓에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근처 지방 관아들의 비용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또한,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의해 어린 아들 대신 친정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는데, 동래온천 여행을 막지 못한 친정아버지 신자수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동래온천은 왜인(일본인)들도 목욕을 하러 오는 곳인데, 신씨가 온천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근처에서 대기하는 왜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씨로 인해 왜인들이 동래에 많이 모이게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남녀구별의 유교사회에서 조선의 왕실여인과 왜인 남성들이 같은 온천을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예장의 문제 제기에 대해 친정아버지인 신자수는 대군 부인의 병이 심하여 치료목적으로 온천에 갔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없다는 답변을 하였다. 이는 아마도 청상과부인 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예장이 문제를 제기했던 날, 당시 국왕인 단종은 경상도관찰사 이숭지에게 광평대군 부인 신씨를 하루 빨리 서울로 데려오라는 명을 내린다. 신씨의 온천여행 장기화에 따른 주변 관아들의 비용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왕실 여인이 왜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목욕을 하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신씨의 동래온천 여행은 친정아버지 신자수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진다. 의정부 당상관들은 유교적 예의범절에 어긋난 신씨의 행실과 또한 왜인들에게 왕실 여인의 행차 정보를 누설하게 하는 등 아비로서 적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신자수를 비난하였고, 그의 파직을 요청하였다. 단종 입장에서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숙모의 안타까운 사정일 수 있겠지만, 성리학 질서의 가장 정점에 있어야하는 조선의 국왕으로서는 이 문제를 무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단종은 신씨의 친정 아버지 신자수에게 이번 소동의 책임을 물어 파직시킨다.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에 대한 글 ⓒ『조선왕조실록』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에 대한 글 ⓒ『조선왕조실록』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빠른 귀경을 독촉하는 글 ⓒ『조선왕조실록』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빠른 귀경을 독촉하는 글 ⓒ『조선왕조실록』

하지만, 불과 나흘만에 반전이 벌어진다. 세종의 차남으로 후에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나선 것이다. 수양대군은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조사 과정에서 사헌부는 명확한 증거도 없이 억측을 벌였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부당한 조사는 법률로도 금지되었는데, 왜 광평대군 부인에게만 이렇게 시행하는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위직 관리들도 귀향할 때에는 근처 수령들이 방문하여 인사하는 당시 세태를 소개하면서 광평대군 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조정의 관리들을 비난하였다. 게다가 신씨에게 동래 온천욕을 소개한 집안의 하인 정선기丁善奇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심하게 매질을 하여 거의 죽게 만들어 버렸는데, 과연 이것이 의리에 온당한지 따져 물었다. 마지막으로 수양대군은 선왕인 세종대왕의 유지를 언급하며 관리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수양대군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광평대군의 유일한 혈육 영순군을 불쌍히 여겨 수양대군에게 잘 보살피라는 유지를 남겼다고 한다. 만약 광평대군 부인과 그 친정아버지 신자수가 동래온천 목욕과 관련하여 죄를 받게 된다면, 영순군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하겠냐는 수양대군의 주장은 국왕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수양대군의 주장은 과연 힘이 있었다. 단종은 이 일을 다시 조사하라고 명령했고, 신하들은 지난 번보다 많이 위축된 의견을 제시했다. 신료들은 비록 광평대군 부인의 행실은 궁중예법에 어긋나고, 또한 왜인들이 조선의 일을 본국에 전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대군 부인에게 죄를 줄 수는 없다고 꼬리를 내린다. 아무리 꼬장꼬장한 사대부 관리라고 하여도 역시 선왕의 유지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사건으로부터 16년이 지난 1469년(예종 1년), 당시 국왕이었던 예종은 연창위공주(세종의 차녀로 세조의 누나인 정의공주, 1415-1477)가 동래 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음식물을 보내드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16년 전 조선에서는 같은 일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있었는데, 이제 동래온천은 왕실 여인들의 휴양소로 바뀐 것이다. 결국 광평대군 부인의 동래온천 목욕은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이 자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시발점이 된 셈이다.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 관련 재조사 결과 ⓒ『조선왕조실록』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 관련 재조사 결과 ⓒ『조선왕조실록』

광평대군 부인 신씨의 동래온천 목욕사건은 유교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 왜인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왕실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동래온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동래온천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444년(세종 26년) 쓰시마 영주인 종성가宗盛家는 사신인 승려 광준을 보내 조선의 예조에 6개 요청사항을 전달한다. 쓰시마는 예전부터 기후와 토지 문제로 농사가 어려워 식량조달을 위해 조선과 일본을 사이에 두고 아슬아슬한 외교전을 벌였다. 이번 요구사항 역시 식량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6번째 요구사항인 동래온천 목욕의 건이다. 이 정도면 정말 외교문서 내용이 맞는지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쓰시마 영주에게 있어 동래 온천 목욕은 그만큼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선 조정은 심사숙고한 결과, 1~5번 요구사항은 모두 거절하고, 동래온천 목욕만 허락해 준다. 쓰시마 전체로 보면, 조선과의 교역실패로 문제가 생기게 되었지만, 영주 자신은 동래온천 목욕을 허락받았으니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6년 후인 문종 즉위년(1450년), 쓰시마 영주는 동래온천을 하러 조선에 오게 된다. 당시 조정은 집현전 수찬인 이극감을 보내 온천목욕 중인 쓰시마 영주에게 음식과 술 등 다양한 선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쓰시마 영주가 조선에 보낸 6개 조목 ⓒ『조선왕조실록』
쓰시마 영주가 조선에 보낸 6개 조목 ⓒ『조선왕조실록』
동래온천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래온천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한 나라의 재상이 올 정도이니 동래온천은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유명했던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고,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았다고 한다. 1766년(영조 42년)에 세워진 동래의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에 따르면, 숙종 17년(1691년) 돌로 2개의 탕을 만들고,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힌 것을 새로 부임한 동래부사 강필리(1713~1767)가 다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탕과 여탕을 구획한 9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것과 같다고 적혀있다. 

동래온천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많은 온천들이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1466년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온천을 발견한 사람은 5품계를 뛰어넘는 관직을 제수하고, 천민의 경우에는 면천까지 시켜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가히 조선왕실의 엄청난 온천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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