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과학자가 쓴 ‘K뷰티 히스토리’ ⑦ <下>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조선왕조실록에는 ‘고계(高髻)'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 단어는 후한(後漢)의 마료(馬廖)가 검소한 덕을 숭상하기를 청하면서 했던 말인 '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그 높이가 한 척이 된다)’에서 유래된 것이다(후한서 권 24 마료열전). 이 문장은 궁궐에서의 사치풍조를 백성들이 본받는다는 말로 임금과 궁궐 사람들의 사치를 경계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계(高髻)라는 단어가 500년 역사동안 모두 29번이나 나온다. 고계(高髻)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묶어 높이 치켜세우는 형태로 머리의 크기와 부피가 확대된 형태의 머리 모양이다. 실록에서의 고계(高髻)란 결국 당시 여인들의 머리장식인 가체(加髢)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시대 당시 가체는 머리장식인 동시에 사치품으로 인식된 것이다. 심지어 서슬퍼런 연산군 시대에도 관리들은 이 고계의 고사(故事)를 임금에게 간언했을 정도이니 조선시대 가체(加髢)란 정말 사치품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이러한 사치풍조를 교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영조와 정조의 경우에는 재위 기간 내내 신하들과 싸우면서 또는 다독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체금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번에는 영조와 정조시대에 있었던 가체금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정조의 경우에는 가체금지 이슈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한 전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51세때의 영조어진(왼쪽)(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선원보감(璿源寶鑑)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
51세때의 영조어진(왼쪽)(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선원보감(璿源寶鑑)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던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는 가체를 둘러싼 사회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영조 2년(1726년) 10월 13일, 조도빈(趙道彬)은 영조에게 고계(高髻) 의 고사를 인용하며 사치를 버리고, 근검절약을 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이듬해인 영조 3년(1727년)에는 효장세자(1719~1728)의 가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조판서 이태좌는 세자빈의 체발 48속(束, 묶음)과 여분 2속을 합하여 50속을 함경도에 배정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갑자기 20속으로 줄여서 배정하라고 지시를 내린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년) 8월 2일). 그런데, 21일이 지난 8월 23일 영조는 신하들에게 착오가 있었다며 다시 하교를 내린다. 원래 자신이 생각했던 체발의 전례는 무술년(戊戌年)이었던 숙종 44년(1718년)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가례식으로 체발 20단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조가 다시 전례를 살펴보니 무술년 당시 체발은 40단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영조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기록인 경종선의왕후 가례도감의궤에 따르면, 사용된 체발은 48단 5개로 엄청난 양이었다. 이에 대해 영조는 무술년의 전례대로 체발 20단을 바치면 실제 자신이 생각했던 무술년의 전례 40단과 다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내린 명령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영조는 무술년의 전례는 굳이 거론하지 말고 무술년의 절반인 20단으로 고쳐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어찌보면 영조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 이태좌는 원래 무술년의 전례에 따라 체발 50단을 준비했지만, 지난 번 왕의 명령으로 20단으로 줄여서 시행하였기 때문에 굳이 다시 의논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태좌는 신하들이 가례식의 비용을 아끼자고 진언한 것도 아닌데, 왕이 스스로 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영조의 행동을 치켜 세웠다. 사실 영조는 비용절감을 위해 무술년의 전례를 따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억을 잘못하여 지시를 내린 것인데, 결과적으로 영조는 신하들로부터 근검절약을 하는 훌륭한 왕으로 칭송을 받았다. 어쩌면 이것은 경험이 풍부한 신하의 처세술일수도 있고, 왕의 근검절약 모습에 대한 진심을 담은 칭송일수도 있겠다. 

영조의 가체에 대한 비용절감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체는 민간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영조 23년(1747년) 7월 29일, 영조는 판충추부사 유척기의 가체금지 의견에 대해 신하들의 생각을 물었다. 그런데, 영조는 이미 주요 신하들의 가체 사용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임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하들은 당황해하며 다른 신하들, 특히 당대 가장 명망이 높았던 민정중과 송시열 집안 역시 가체와 화관(花冠)을 사용한다고 둘러댔다. 또한, 우의정 민응수는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당시 명나라의 옛 제도를 구하려 하였지만, 흔적도 없었고 지금 청나라에 있는 머리장식들은 너무 사치스럽고 화려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비록 유척기의 의견대로 가체를 금하려고 했지만, 가체의 대체물품인 화관(花冠)의 경우 내부의 모양이 다른 사람과 구별이 없기 때문에 문장과 제도를 이와 같이 바꾸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체를 금지하자는 신하보다 현재대로 유지하자는 신하가 많은 모양이라 아무리 임금이라고 해도 함부로 가체를 금지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2년의 시간이 지난 영조 25년(1749년) 9월 23일 다시 한 번 가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이 논의에서 이천보(1698~1761), 김약로(1694~1753), 그리고 홍봉한(1713~1778)은 모두 오래된 전례가 아니고, 타인의 모발로 나의 머리를 꾸미는 것은 예가 아니며, 또한 사치로운 풍조를 조장하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영조는 가체를 없애고 이것을 대체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때, 사관 이의철은 사치를 이유로 가체를 금지시킨다고 해도 그 대체품이 새로운 사치품이 된다면, 가체를 금지시킬 이유가 없지 않겠냐는 반문을 한다. 이 말을 듣고 영조는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신하들이 자기 집안 사람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금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

가체의 사치는 점점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영조 32년(1756년) 1월 16일 영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영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한편, 속칭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였다. 가체 때문에 발생하는 사치의 문제를 더 이상 방종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의친왕비 화관(경운미술관 소장)과 일러스트(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년)
의친왕비 화관(경운미술관 소장)과 일러스트(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년)

가체금지라는 영조의 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간에서는 여전히 가체 사용이 계속된 것 같다. 가체금지 명령이 내려진지 1년 후인 영조 33년(1757년) 11월 1일, 영조는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또 다시 가체금지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홍봉한은 백성들의 불필요한 사치를 막기 위해 가체금지가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불과 1년 전 영조는 가체금지 명령을 내렸는데, 나라의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홍봉한의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한달이 지난 12월 16일, 영조는 비변사(備邊司)의 정3품 이상 당상관을 부른 후, 다시 한 번 가체금지 명령을 내린다. 영조는 가체금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치려고 하여 여러 신하에게 묻고, 심지어 과거시험의 책문으로 시제까지 내었지만, 여전히 해결의 기미가 없었다는 답답함을 토로한다. 이에 여러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자신이 직접 해결책을 제시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영조는 가체라는 제도는 원래 궁중에 없었고, 지위가 높은 사족(士族) 부인들이 좋아한 풍속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런 풍속이 사치로 흘러 큰 문제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영조는 원래 사족의 부인들은 궁중의 양식을 잘 따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궁중의 머리 양식을 가체에서 쪽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사족의 부인들이 이를 잘 따르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사족의 부인들이 다시는 가체를 사용하지 말게 하고, 대신 상민과 천민은 가체를 그대로 사용하라는 명령도 내린다. 이제부터 가체를 사용하는 사족의 부인들은 상층계급이 아닌 상민과 천민으로 취급하겠다는 영조의 단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사족 부녀의 가체를 금지한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5일 후인 12월 21일, 영조는 구윤명과의 대화에서 다시 한 번 가체의 사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영조는 과거의 사치와 지금의 사치는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서 시체(時體)라고 불리우는 한정된 재물에 대해 많은 비용을 쓰는 것이 지금 사치문제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즉, 가체 자체가 사치품이 아니라 거기에 돈을 많이 쓰는 사람들의 행태가 사치라는 것이다. 

사족 부인의 가체금지 명령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것 같다. 이듬해인 영조 34년(1758년) 1월 13일 영조는 가체를 금하고, 궁중의 머리장식인 족두리 이용을 허락하였다. 아울러 모든 다른 머리모양을 엄금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제 사족 부인들은 오로지 족두리만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가체금지는 영조의 바람대로 쉽게 흘러가지는 못했다. 사족 부인에 대한 가체금지를 명령한지 꽤 시간이 지난 영조 38년(1762년) 7월 12일에도 영조는 가체금지를 또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영조의 가체금지 명령은 사족 부인들 사이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이 생긴다. 영조 39년(1763년) 11월 9일, 영조는 돌연 체계(髢髻, 머리모양)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치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임금의 모습은 사라지고, 신하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체계(髢髻)의 옛 제도가 다시 회복된 이유는 대신 사용하던 족두리에 대한 신하들의 불평불만이 많았고, 또한 족두리는 궁중의 양식과 구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족두리를 비싼 보석으로 꾸밀 경우 그 비용이 기존의 체계(髢髻)와 다를 바 없다는 의견도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가체하는 것만은 계속 금지시켰다. 가체만 하는 것은 계속 금지시키면서 머리모양의 옛 제도를 회복시켜 준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여하튼 영조는 신하들의 요구에 굴복한 셈이니 이 때 영조의 왕권이 그만큼 약화된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든다. 

영조의 가체금지에 대한 생각은 영조 말년 신하들과의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영조 42년(1766년) 10월 24일, 영조는 김치인과의 대화에서 이조낭관, 한림(翰林), 산림(山林), 균역(均役)은 본인이 지키기를 고집하였으나, 체계(髢髻)와 방백(方伯)의 솔권(지방직 관리들이 집안식구들을 데리고 부임하는 행태)은 심하게 관계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대로 허락하였다는 소회를 말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체계(髢髻) 역시 금지시키고 싶었지만, 임금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영조실록에서 가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영조 50년(1774년) 7월 17일 실록에 나온다. 영조는 장령 이홍제의 가체 비용을 검소화하자는 법 제정에 대해 가납한다는 말만 할 뿐 어떤 새로운 조치도 없었다. 재위 52년동안 사치풍조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영조 임금이었지만, 그에게도 가체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1752~1800, 재위:1776~ 1800) 역시 가체의 사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위 기간 내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먼저 정조 3년(1779년) 2월 14일, 송덕상(宋德相)은 체발의 습관을 엄금하고, 대신 화관(花冠)을 사용하여 당시 사회문제였던 사치 문제를 제거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정조는 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가체금지는 갑작스럽게 시행할 수 없으니 조정신하들 사이에서 좀 더 논의를 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선왕인 영조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였기 때문에 정조 역시 섣불리 다루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가체금지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과 정조의 사치 반성(정조실록, 정조 3년(1779년) 2월 25일)
가체금지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과 정조의 사치 반성(정조실록, 정조 3년(1779년) 2월 25일)

이로부터 열흘 정도 지난 정조 3년(1779년) 2월 25일,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가체금지를 논의해 보라는 정조의 하교에 대한 답을 올린다. 김상철은 논의 과정에서 가체의 대체제가 없기 때문에 보고가 늦어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조는 가체금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가체금지는 단순히 가체만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치풍속을 몰아내고 검소함을 숭상하자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사치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가체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가체를 비롯한 풍속의 문제는 지배층의 책임으로 결국 임금인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정조도 가체문제 해결을 위해 즉위초 나름대로 노력을 한 적이 있었다. 우선 궁중에서 가체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게 했지만, 정작 민간에서는 족두리 사용이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가체를 대신하는 화관(花冠)의 경우에도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상민과 천민은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점도 이야기하였다. 정조는 지금의 문제는 가체뿐만 아니라 의복, 음식, 말, 그리고 집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사치가 일상화되고, 이러한 사치를 숭상하는 세상의 풍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진단을 내린다.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마친 정조는 이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가체의 경우에도 문제가 제기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해결의 노력이 부족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민간의 여인들한테 검소한 생활을 요구할 수 있겠냐며 신하들을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무작정 신하들을 비난해봐야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임금인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함께 언급하였다. 정조는 지금의 사치풍조 문제는 결국 임금인 나의 탓이며,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결국 형식적인 겉치례로 보일 뿐이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였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임금인 자신과 신하들의 노력, 즉 신하들 각자의 가정에서 올바른 가정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6일, 정조의 경연 자리에서 송덕상은 가체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정조에게 말하였다. 이에 정조는 가체문제는 그 문제의 근본을 다스려야 해결이 가능하며 가체의 문제가 아닌 전반적인 사치의 문제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임금과 신하 모두 이를 경계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2월 25일 자신이 언급했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정조는 만약 가체 대신 화관을 사용해도 이 문제는 또 다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체의 대체제를 도입해도 문제해결은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결국, 이 당시 정조가 생각한 가체문제의 해결방법은 법을 통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임금과 신하가 함께 노력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조 3년(1779년) 시작된 송덕상의 가체금지 주장과 이에 대한 신하들의 회의론,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정조의 입장은 도돌이표처럼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8일 경연관 김양행(金亮行)은 가체문제를 빌미로 정조에 대한 불만사항을 쏟아낸다. 그는 최근 송덕상이 제기하는 가체금지 문제에 대해 도대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며 정조의 반응을 떠 보았다. 정조는 평소 자신의 생각대로 말을 하였다. 즉, 가체금지란 사치풍속을 없애기 위함이지만, 그렇다고 가체 대신 화관과 같은 다른 대체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사치의 문제 해결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김양행은 그럼 가체를 사용하되 검소하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백성들이 힘든 이유는 지배층의 사치풍속 때문인데, 이것은 오랜 폐단으로 빠른 해결이 어렵다. 또한,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신하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데, 지난 번 왕의 능행길을 보니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보였다. 임금부터 이렇게 사치를 부리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훈계할 수 있냐고 정조를 대놓고 비난하였다. 의외의 일격을 받은 정조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가 오른 김양행은 최근 조정의 일들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운을 띄운 후, 특히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으로 외삼촌인 홍낙임(洪樂任)의 경우 역모죄가 분명하지만, 왜 아직도 처벌하지 않는지에 대해 따져 물었다. 궁지에 몰린 정조는 어쩔 수 없이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여 홍낙임을 처벌할 수 없었다는 다소 궁색한 답변을 하였다. 정조의 아픈 곳을 건드린 김양행은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정조가 즉위한 이래로 백성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계속된 역모로 신하들은 처벌받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따라서, 임금은 이러한 문제부터 먼저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백성들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충고를 하였다. 아마도 김양행은 지금 백성들이 계속된 역모사건으로 불안해하는데, 이것보다 여인들의 가체금지 문제나 신경쓰는 신하들과 정조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다행히 김양행의 의견에 대해 정조는 “경의 말이 매우 착하니 유의하겠다”라며 마무리를 지었다. 가체문제로 시작된 논쟁은 결국 정조의 최근 사치행적에 대한 비난과 임금으로서의 정치력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되어버린 셈이다. 정조의 입장에서 이제 가체문제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백성들의 교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임금인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머리모양(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조선시대 여인들의 머리모양(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백성들의 교화를 통한 가체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정조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사회문제가 된것 같다. 정조 7년(1783년) 7월 7일, 공조참의 여선덕(呂善德)은 상소를 통해 사치로운 가체로 인한 사회문제를 보고한다. 여선덕은 과거에는 가체 가격이 100냥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0냥에 이른다며 흉년에도 불구하고 사치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구황의 예비대책으로 사치하는 습속을 빨리 바로잡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의견을 말하였다. 4년전 경연관 김양행에게 가체문제로 인해 자신의 정치력을 의심받았던 기억이 났었는지 정조는 여선덕의 상소에 대해 “말이 매우 절실하니 유의하겠다”라는 답을 내렸다. 

시간은 또 흐르고 정조 12년(1788년)이 되었지만, 가체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즉위한지 12년이 지나도록 가체금지 문제는 임금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하여도 왕 혼자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가체금지만 하더라도 정조의 뜻에 동조하는 신하들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아무런 대안없이 그저 가체금지를 주장하는 부류와 가체금지는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 그리고 가체문제를 빌미로 정조의 왕권을 흔드는 부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던 중, 6월 12일 우통례 우정규가 최근의 국정문제 40여 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경제야언(經濟野言)』이라는 책을 정조에게 올렸다. 이 무렵 정조는 신하들에 대해 나름의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정규의 상소를 받은 후, 정조는 최근 신하들의 상소에는 중요한 의미도 없었고, 특히 당파싸움과 관련된 것들이 많아 백성들의 삶을 위한 것들은 거의 없다고 질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규가 오랜만에 경제에 대한 내용으로 상소를 하였으니 중요한 내용은 본인이 직접 챙기고, 나머지 사항들은 조정에서 다 같이 고민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정조의 지시가 내려진 후 2달이 지난 8월 18일, 신하들은 우정규의 가체금지에 대한 의견을 보고하였다. 정조 12년(1788년) 8월 18일 일성록에는 당시 신하들과 정조 사이의 논의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신하들은 과거에도 가체금지를 위해 다양한 방법이 시행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성과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가체를 대신할 수 있는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고한다. 비록 족두리 같은 대체제가 소개되었지만, 이것이 전례에 합당한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에 대해 정조 역시 부녀자들의 가체금지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부터 신하들 각자의 집에서부터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라고 많은 당부를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신하들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일반 사족과 백성들한테 사치를 줄이고 검소함을 숭상하라고 말할 수 있겠냐며 조정 신하들에게 쓴소리를 하였다. 정조 역시 많이 답답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 때에도 정조는 나중에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가체 문제는 정조에게도 역시 해결하기 힘든 난제였다. 그런데, 같은 날 일성록이 아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같은 내용에 대해 전혀 다른 뉘앙스의 기록이 올라온다. 실록의 사관은 우정규의 『경제야언』에 대해 쓸데없고 난잡한 말이 대부분이라 그의 상소 내용은 대부분 채택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다. 아마도 우정규의 상소는 기존 관리들의 입장에서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정규의 상소 중 여인들의 가체금지에 대한 내용은 정조의 가장 큰 행적 중 하나인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도화선이 된다. 10월 3일 정조는 조정의 주요 신하들에게 가체에 대한 의견을 집요하게 묻고 따졌다. 정조의 질문에 대해 영의정인 김치인은 가체금지는 과거 영조도 해결해 보려고 하였지만, 대체제의 부족으로 실패하였다며, 대체제가 있다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었다. 좌의정인 이성원은 가체는 고질적인 폐단이라 해결이 어렵다고 짤막하게 답변하였다. 호조판서 서유린은 먼저 대응하는 제도를 만들고 가체금지를 해야한다고 하였고, 예조판서 이재간은 가체 대체제를 제시하고 왕이 결단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조판서 정창순은 좀 더 토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형조판서 이병모는 대체제를 정하고, 왕이 결단하면 된다고 말하였다. 신하들은 가체금지의 대의는 동의하지만, 왕의 결단과 대체제 선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좀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보여주었다. 또 다시 도돌이표가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우의정 채제공의 속시원한 발언은 정조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채제공은 지금도 백성들이 가체문제로 고통받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대체제 논의로만 헛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왕이 바로 가체금지를 결단하면, 대체제는 법규 사이에 아무것이나 넣어도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결론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가체문제에 대해 교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다소 느슨한 정조의 입장이 갑자기 확 바뀐 것이다. 정조는 채제공의 말에 동조하며 가체금지는 선왕인 영조의 뜻을 밝히고 계승하기 위함이라는 대의명분을 밝힌다. 또한, 영조 39년(1763년)의 가체금지법 폐지 이유는 신하들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영조의 뜻이 아닌 역적 홍인한(洪麟漢, 1722~1776)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홍인한은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동생으로 정조에게는 외삼촌이지만, 사도세자를 죽게 한 임오화변(1762년)의 주동자들 중 한 사람으로 정조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정조는 홍인한이 감히 ‘궁중의 모양’이라는 말을 만들어 영조를 무시하고 조정 신하들을 겁박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그의 위세 때문에 가체금지 폐지에 큰 힘이 실렸고, 그래서 영조도 어쩔 수 없이 폐지하였다고 말하였다. 정조의 홍인한에 대한 비난은 계속 쏟아졌다. 홍인한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사람으로 가체의 모양을 크게 하는 사치를 부렸고, 특히 그의 딸과 며느리의 가체에 큰 돈을 들여 재물을 낭비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홍인한이기에 영조의 가체금지 명령에 대해 항상 마음속으로 불평이 많았고, 결국 영조가 만든 법을 저지하는 신하의 분수가 없는 역신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가체금지에 대해 형인 홍봉한은 영조의 뜻을 따랐지만, 동생인 그는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조정의 죄인인 동시에 집안에서는 패륜을 저지른 아우라고 하였다. 정조는 왕의 결단에 대해서는 신하들이 생소하고 잘 이해가 안되더라도 가볍게 시비를 논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면서, 홍인한은 나쁜 생각과 교활한 수단으로 사익추구를 위해 영조의 법을 파괴하였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그는 역적이고 죽어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다. 실제로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한 지 세 달도 못된 1776년 7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조는 홍인한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 다음, 이러한 사정을 젊은 관료들이 알 수 있도록 반포하고 게시하라는 명을 내린다. 

홍인한의 죄에 대한 비난이 한바탕 끝난 후, 정조는 바로 가체금지 법령을 다시 회복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정조 12년(1788년)에 제정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다. 할아버지 영조가 홍인한의 위세에 떠밀려 1763년 폐지했던 법령을 25년만인 1788년 다시 회복했으니 당시 정조의 마음은 매우 가슴벅찬 감격으로 가득차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날 정조는 사치에서 검소로, 그리고 야만에서 문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가체금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선왕인 영조의 5가지 업적인 감필(균역법), 준천(청계천 준설), 금주(금주령), 호혼(노비종모법), 그리고 거체(가체금지) 가운데 마지막인 가체금지의 뜻을 밝히고 그것을 계승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정조는 가체제도가 원래 예(禮)에 맞는 제도도 아니고, 사치의 문제로 인해 인륜까지 무너지고 있으니 빨리 이것을 금지시키고, 대체제를 속히 지정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한양은 동짓달을, 그리고 각 지방은 공문서가 도착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하여 엄히 시행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마지막으로 최근 새로운 법을 무시하는 풍조가 있는데, 이번의 가체금지법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며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가장(家長)을 먼저 연좌제로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다. 교화를 통해 가체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느슨한 모습은 사라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정조는 영조대의 가체금지법이 실패한 이유로 법령의 구체성이 미비한 것으로 보고 비변사를 통해 구체적인 법령의 내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가체신금사목은 정조의 이러한 의지를 반영하여 총 1책 18장으로 구성되었다. 가체금지법은 한문인 원문 8장, 그리고 한글 10장으로 되어 있어 민간의 여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책에는 가체금지법을 만들게 된 경위와 가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 그리고 가체금지 규정에 대한 서문과 9개의 시행조항이 들어있다. 

비변사가 보고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9가지 조항에 대해 당시 영의정 김치인은 2가지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우선 부인들이 쪽머리에 비녀를 꽂는 낭자계(娘子髻)는 가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허용해도 된다는 것과 특히,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부족한 부인들은 이러한 쪽머리가 불가능하니 나이에 따라 가체를 허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낭자계는 부인의 머리모양이 아닌 미혼 여인의 머리모양이다. 하지만, 나이든 부인들의 안타까운 경우도 있고, 특히 과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가체 금지 강경파인 우의정 채제공은 절대 불가를 주장한다. 채제공은 이번 법령은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대신 사용하게 하는 것인데, 나이에 따른 예외조항이 생긴다면 결국 나중에 가서 가체가 다시 사용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또한, 영의정이 주장하는 낭자계를 위해서는 가장 긴 다리 꼭지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번 가체금지법 자체에 위반되는 내용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나이에 따른 예외조항은 필요없다는 원칙론을 고수하였다.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한글판, 한문판 및 표지(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한글판, 한문판 및 표지(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반대로 판부사 김익은 부인의 비녀 사용은 예(禮)에 따른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머리카락을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특히, 가체가 아닌 자신의 원래 머리카락을 올리는 것 정도는 허용해야 한다고 하고, 이것은 사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머리카락이 없거나 부족한 나이든 부인 이외에도 젊은 나이임에도 머리카락이 부족한 부인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예외조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히려 낭자계를 금하지 말고 허락한다면 머리모양의 제도가 단순명료해져서 오히려 더 편리하고 행하기 쉬운 제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과부의 경우에는 이런 낭자계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판부사 이재협과 유언호 역시 낭자계는 가체 사용이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익과 마찬가지로 나이든 부인의 경우 쪽머리가 어려우니 가체 사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채제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들이 가체사용을 계속 허용해야 한다고 하자,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낭자계는 원래 부인들이 아닌 미혼 여인들의 머리모양으로 영의정과 일부 신하들은 이 낭자계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본래 낭자계는 남자의 쌍동계(雙童髻)와 같으니 판부사 김익의 주장처럼 부인들의 낭자계를 허용하게 된다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가체를 일부 허용하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의 기록을 본다면, 즉위 후 12년동안 가체문제에 대해서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교화를 통한 온건한 문제해결을 주장해 온 정조가 하루 아침에 전격적인 결단을 한 것도 모자라 가체금지에 대한 논리 싸움에서도 신하들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사전에 전부 다 기획해 둔 것처럼 10월 7일 정조는 가체금지법령을 각 부처에 전달할 때 실수가 생길 수 있으니 전담 관원을 지정해 두라는 치밀함까지 보여준다. 한편, 정조는 이 법령이 한시라도 빨리 백성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정조는 한성판윤 서유방에게 한양의 수모(首母, 머리어멈으로 오늘날의 헤어디자이너에 해당)들을 모두 관청에 불러 이번 가체금지법을 교육하고, 이들이 한양 도성의 여러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였다. 또한, 이조판서 정창순에게는 법령의 반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물어보았는데, 정창순은 5~6일 정도 걸릴 것으로 보고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8일, 정조는 한성판윤 서유방을 다시 불러 진행사항을 물어보았다. 이는 가체금지법에 대한 정조의 집요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유방은 어제(10월 7일) 저녁 한성부의 행정구역인 오부(五部)에 통지하여 오늘(10월 8일) 아침 한성의 모든 수모를 모이게 했는데, 그 결과 33인이 모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들에게 새로 바뀐 머리모양의 견본을 보여주고, 전·현직 의녀들이 이것에 대해 가르쳤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들 수모들은 머리모양에 익숙했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 있었고, 그녀들은 단골집과 도성내의 사대부 및 중인 집들을 일일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정조의 급한 성격을 잘 알았는지 한성판윤 서유방은 수모들에게 오늘안에 이것을 끝내라고 하였지만, 수모들은 방문해야 할 곳이 많다고 하면서 내일까지 가능하다고 답하였다. 서유방은 정조에게 기한을 늘려달라는 수모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불시에 사람을 보내 수모들이 임무를 게을리할 경우 처발하겠다는 으름장도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서유방의 적극적인 행정조치가 마음에 들었던지 정조는 빠른 시일안에 가체금지법이 백성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주요 9가지 내용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10월 3일)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의 주요 9가지 내용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10월 3일)

그리고, 3일이 지난 10월 11일. 정조는 다시 서유방을 불러들여 수모들이 조정의 고위 관리들의 집 외에는 아직도 가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오늘부터 3일내로 한성의 수모들을 다시 모아 모든 백성들의 집에 가서 가체금지법을 전파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서유방은 수모들의 사정에 대해 정조에게 새로운 보고를 한다. 서유방에 따르면, 한성에 있는 수많은 집들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수모 한 명이 하루에 보통 4~5곳 정도만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수모들이 단지 가체금지법 교육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만지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가체금지법을 전해야 하다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성에는 민가가 5만호가 넘는데, 한성의 수모가 고작 40인 정도였다. 한 사람의 수모가 하루에 40곳을 가더라도 하루에 1600곳이고, 3일이면 4800곳 정도이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정조는 합리적인 이유라고 생각을 했는지, 5~6일 후에 다시 무작위로 추출하여 조정 관리의 집을 막론하고 수모가 다녀갔는지 다시 조사하여 만약 아직도 다녀가지 않았다면 귀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한편, 가체금지법에 대한 정조의 엄명과 한성판윤 서유방의 적극행정은 엉뚱한 곳에서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이 무렵, 채제공은 한성에서 어리고 무뢰한 사람들이 포도청 소속 또는 형조의 하인을 사칭 하면서 아직 가체를 사용하고 있는 부녀자들의 쓰개치마를 벗겨내고 가체를 훔쳐간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어서 채제공은 원칙적으로 한성에서의 가체 사용은 동지(冬至)까지 가능한데, 가체금지법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 사건에 놀란 정조는 포도대장을 불러 이들 무리를 잡아 처벌하라는 지시와 함께 포도청의 포교들 가운데 혹시 이런 무뢰한 무리가 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가체금지법이 반포된 지 한 달 정도 지난 11월 5일, 정조는 경희궁으로 이동하던 중 종로거리에서 시전상인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운 점을 듣고, 이에 대해 좌의정 이성원과 우의정 채제공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였다. 먼저 가체금지법의 최대 수혜자인 족두리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가체신금사목에 따르면, 가체 대신 검은색 무명 족두리를 사용하게 되는데 검은색 무명천의 사용과 관련해서 면주전 상인들이 시비를 걸었다. 면주전 상인들은 무명천의 염색은 자신들의 본업인데, 족두리전에서 무명천을 검게 염색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좌의정 이성원은 면주전의 염색은 홍색, 남색, 녹색, 백색, 자적색과 황색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검은색 염색은 그 사업범위에 없기 때문에 면주전의 주장은 사리에 어긋한다고 하였다. 또한, 우의정 채제공도 검은색 염색은 면주전의 물품에 없는데, 족두리전에서 이것을 하자 자신들의 일을 잃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보고를 하였다. 정조는 두 신하의 의견을 참고하여 족두리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족두리전의 논리가 타당한 것도 있겠지만, 가체금지법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족두리의 사용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부분도 감안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족두리전과는 반대로 가체를 판매하던 월외전(月外廛) 상인들은 가체금지법에 의해 그들의 생업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가체금지법으로 인해 자신들이 너무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며 이것을 감안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은 비록 가체는 금지되었지만, 소첩체(小貼髢)와 낭자계(娘子髻)의 사용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가체금지법이 왕명으로 반포되었는데, 감히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우의정 채제공 역시 생업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도와줄 방법은 없다고 하면서 이런 소란을 피운 것은 매우 외람된 것이라는 보고를 하였다. 월외전 상인들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대신 그들의 소원이 받아들여졌다는 기록도 없다. 

정조 12년(1788년)의 가체신금사목 반포와 함께 가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을까? 2년 후인 정조 14년(1790년) 2월 19일 지평 유경은 새로운 가체 문제를 보고한다. 가체금지법에 의하면, 상민과 천민 여인들은 본인 머리카락을 땋아 머리에 얹는 밑머리는 허용되었지만, 이들 역시 가체 사용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한성 길거리에서 이들 상민과 천민 여인들의 머리 부피가 점점 커지고, 사대부 집의 여종들 역시 본인의 머리카락을 위주로 머리를 꾸미는 세태를 보고하였다. 유경은 이에 따라 한성5부에 다시 한 번 가체금지법을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간언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가체금지법을 전파하는 것은 효과가 떨어지고, 대신 사대부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대부의 여종들이 가체를 사용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주인들의 머리모양은 훨씬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인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엄히 단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조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가체신금사목 역시 반포된지 2년만에 이렇게 저항을 받게 된 것이다. 

정조의 가체와 관련된 마지막 기록은 정조 18년(1794년) 10월 5일에 나온다.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던 중 정조는 요즘 가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갑자기 물어보았다. 좌의정 김이소는 사치스러운 머리 모양은 줄었지만, 뒷머리의 경우 점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 정해진 규격을 넘지 말라는 엄격한 법조문의 시행을 보고하였다. 이에 정조는 부녀자의 뒷머리 크기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강제적인 법 집행보다는 신하들 스스로 집안 단속을 통해 정해진 제도를 잘 지킨다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가체신금사목을 만들 당시 단호했던 정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시 교화를 통한 온건한 가체문제 해결로 돌아선 것은 아닐까 싶다. 

이번 호에서는 가체금지를 추진하려고 했던 영조와 정조의 오랜 노력에 대해 소개하였다. 1724년 즉위한 영조로부터 1800년까지 재위했던 정조에 이르는 약 80년의 기간동안 두 왕이 엄청나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체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했다. 아무리 절대왕권의 시대라고 하여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간 본성을 억누르는 정책은 역시 성공하기 어려운 듯 하다. 사치품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조선 500년동안 계속 이어져온 가체는 진정 조선의 명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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