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향에 진심이었던 조선왕실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유교국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행사 중 하나는 제사祭祀였다. 특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서 제사는 국가가 주관하는 매우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였다. 종묘는 역대 선왕과 왕비들의 신주神主(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의물儀物)를 봉안한 곳이고,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을 모신 곳이다. 건국대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유교적 세계관에서 사람은 영혼인 혼과 육신인 백이 결합된 존재이고, 죽음이란 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졌다[1]. 그래서, 죽은 조상의 혼을 모시는 묘를 세우고, 백(육신)을 땅에 모시는 묘를 만들어 조상을 숭배하도록 했다. 따라서, 조선왕실에 있어 종묘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1342~1398)의『조선경국전』에 따르면, “왕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고 나서 반드시 종묘를 세워 조상을 받을어 모신다. 이것은 자기의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매우 큰 도道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농업국가 조선에서 땅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사직단은 바로 이런 땅과 그 소산인 곡식에 대한 제사의 공간이었다. 사社는 토지의 신이고, 직은 곡식의 신이다. 인간은 땅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사직단에서의 제사는 농업의 중요성을 알림과 동시에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는 국왕의 중요한 책무였다. 

제사는 그 격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그리고 소 사小祀로 나뉘었다. 종묘와 사직에서의 제사는 모두 대사大祀로 최고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한 의식 절차가 있었다. 한편, 이러한 제사에 있어 절대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향이었다. 향은 제사에서 하늘에 있는 신을 땅으로 불러들이는 수단이었다. 제사를 지낼 때 향이 없다면 신을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결국, 향은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향은 매우 귀중한 물품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향을 관리하기 위해 ‘향실香室’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였다. 향실은 교서관 소속으로 국가의 각종 제사에 사용되는 향과 축(제사를 받는 신에게 전달하는 글, 보통 축문이라고 한다)을 관장하는 관서였다. 향실은 각 궁마다 있었으며, 창덕궁의 경우 대전인 인정전의 바로 옆에 있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거나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는 등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 인정전의 바로 옆에 향실이 있었던 것이다. 

종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종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직단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직단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순조 때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동궐도東闕圖에서도 창덕궁의 향실을 볼 수 있다. 인정전 바로 옆에는 길게 이어진 건물들이 있는데, 그 첫번째 건물이 바로 향실이다. 향실에는 내시별감 1인과 교서관 참외관 1인이 향과 축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내시의 경우, 글을 잘 아는 6명을 향실 별감으로 삼아서 임명하였고, 교서관 참외관은 돌아가면서 숙직하였다. 향실의 향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물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왕실가족이라 하여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2]. 

 

강진향을 남용한 소격전 제조 최덕의(崔德義) 파면 

조선왕조실록에는 향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세종 1년(1419년) 7월 14일 소격전昭格殿 제조提調 최덕의崔德義가 강진향降眞香을 남용한 일이 발각되어 파면되었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로 개국하였지만, 개국 초기 아직 고려의 문화가 남아 있어 도교식 제사를 지내는 소격전이 정식 행정기구로 존재하였다. 이 소격전의 최고 책임자는 제조提調로 정2품 고위직이었다. 정 2품은 오늘날의 3급 이상 고위 공무원단 소속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고위공무원을 한 번에 파면시킬 정도로 강진향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강진향降眞香은 콩과에 속하는 식물인 강향단의 속살로 만드는 향료로 강향이라고도 불리우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강진향에 대한 제법이 실려있다. 

창덕궁 인정전. 왼쪽 하얀색 네모가 향실(香室) ⓒ구글 어스
창덕궁 인정전. 왼쪽 하얀색 네모가 향실(香室) ⓒ구글 어스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있는 향실(香室) ⓒ구글 어스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있는 향실(香室) ⓒ구글 어스
창덕궁의 향실 현판 ⓒ문화재청 자료
창덕궁의 향실 현판 ⓒ문화재청 자료

최덕의崔德義는 천재지변이나 국가의 중요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도교식 제사를 올리던 관리였다.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 태종 10년(1410년)에 처음 나온다. 태종 10년 (1410년) 4월 6일, 종5품인 서운관書雲觀 유당생이 역일을 잘못 계산하여 경상도 영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서운관書雲觀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기관으로 천문학, 지리학, 역수曆數(책력), 측후測候 및 각루刻漏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오늘날의 기상청에 해당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같이 역일을 검토하던 종 3품 서운관 겸정 최덕의를 비롯한 다른 관원들도 파직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태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인 태종 11년(1411년) 5월 21일에는 가뭄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 때, 검교 참의(실제 직무가 없는 명예직으로 정3품 관직에 해당) 최덕의는 서울의 양진楊津에서 용을 그려 놓고 비를 기원하는 제사인 화룡제畫龍祭를 지냈다. 양진은 지금의 서울 광진구 광장동 주변으로 광진廣津으로 도 불렸다. 

동궐도(東闕圖)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궐도(東闕圖)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궐도(東闕圖)’에서 향실(香室)을 확대한 모습 ⓒ이준배(직접 촬영)
‘동궐도(東闕圖)’에서 향실(香室)을 확대한 모습 ⓒ이준배(직접 촬영)

태종 12년(1412년) 7월 19일 전라도 순천부 장성포長省浦 바닷물이 4일동안 붉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바닷물이 붉어지는 적조현상은 지금은 익숙한 자연현상이지만, 당시는 천재지변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판단하였고, 이번에도 제사의 달인 최덕의가 파견되었다. 최덕의는 당시 서운관 판사로 정3품의 고위직이었다. 그는 전라도 장성포長省浦로 가서 나라의 천재지변 때 하늘에 드리는 제사인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장성포는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쌍봉동 일대로 일명 장생포長生浦로 불리기도 한다. 

태종 13년(1413년) 7월 5일에는 기우제를 위해 관리들을 서울 주요 지역에 보내고, 승려 100명을 흥천사의 사리탑에 모아서 조계종 판사에게 향을 받들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또한, 무당까지 동원하여 한강에서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한편, 검교 공조참의(임시직 또는 명예직으로 공조의 정3품 관리) 최덕의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서울의 저자도楮子島에서 화룡제라는 기우제를 지냈다. 저자도는 서울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 한강에 있던 섬으로 1970년대 한강 개발 사업과정에서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인해 현재는 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강진향 줄기 심재(사진 왼쪽) 및 확대 사진.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식품의약품안전처, 2022년
강진향 줄기 심재(사진 왼쪽) 및 확대 사진.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식품의약품안전처, 2022년

한강 저자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불과 22일만인 7월 27일, 최덕의는 또 다시 전라도 순천부 장성포로 출장 제사를 지내러 가게 된다. 장성포는 1년 전인 태종 12년(1412년) 7월 19일 적조 때문에 출장 제사를 지내러 갔던 곳인데, 1년만에 또 다시 가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적조현상이 심각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모두 피해를 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로 최덕의를, 그리고 경상도로 서운관 판사 애순을 보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되어 경상도로 제사를 갔던 애순으로부터 조정에 긴급보고가 도착했다. 애순이 경상도로 간 이유는 국가의 천재지변이 발생했을때 지내는 해괴제解怪祭 제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애순이 가져간 축문은 해괴제의 축문이 아니라 한강의 목멱산(지금의 서울 남산)에 지내는 제사의 축문이었던 것이다. 축문은 신에게 전달하는 인간의 메시지인데, 잘못된 메시지가 도착했으니 애순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축문의 작성은 문신 관원의 일이고, 이것을 향과 함께 포장하는 것은 향실 내시별감內侍別監의 업무이다. 그런데, 내시 별감인 허초許礎가 포장을 잘못하여 애순에게 전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허초는 장 100대의 벌을 받게 되었지만, 벌금으로 대신하여 실제로 장을 맞지는 않았다. 국가의 제사와 관련된 업무는 이렇듯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겸재 정선의 광진(廣津)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의 광진(廣津)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태종에 이어 왕이 된 세종 시대에도 최덕의의 제사 업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세종 1년(1419년) 6월 8일 세종은 이조판서 맹사성, 검교 한성부 최덕의, 그리고 우의정 이원에게 각각 소격전, 경복궁 경회루, 그리고 원구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특히, 최덕의가 지낸 기우제는 석척기우蜥蜴祈雨로 이것은 도마뱀이 용과 비슷한 모양이라 하여 도마뱀을 잡아 병에 넣어 냇물(경회루 연못)에 담가 두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아마도 다른 기우제보다 어려운 기우제 방식이기 때문에 전문가인 최덕의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경회루 연못에서의 기우제로부터 한 달 후인 7월 14일, 소격전 제조 최덕의는 강진향降眞香을 남용한 죄로 갑자기 파직된다. 그 후,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태종 10년(1410년)부터 세종 1년(1419년)까지 10년간 국가와 왕실을 위해 열심으로 제사를 지낸 최덕의는 이렇게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강진향이라는 향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제사 전문가 최덕의는 역사속에서 사라졌을까? 우리는 세종을 자상하고 관대한 왕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관리들과 달리 최덕의는 어떻게 향과 관련된 한 번의 실수로 이렇게 큰 벌을 받게 되었을까? 이것은 향에 대한 평소 세종의 자세를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향축궤(제사용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향축궤(제사용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세종대왕을 열받게 한 향 배달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세종대왕의 이미지는 매우 어질고 자상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실록을 통해 세종의 인성에 대한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2008년 세종대왕 전문연구가인 박현모 작가는 그의 저서『세종처럼』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상노上怒’와 ‘상대노上大怒’라는 단어의 검색만으로 역대왕들의 화낸 횟수를 조사한 적이 있다. 이러한 박현모 작가의 검색방법과 검색어에 ‘상진노上震怒’를 추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역대왕들의 화낸 횟수를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또한, 재위 15년 이상의 왕들을 대상으로 하여 연간 화낸 횟수도 계산해 보았다. 

화낸 횟수로 본다면 영조, 태종, 그리고 숙종의 순서로 많았다. 하지만, 영조의 경우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기 때문에 화낸 횟수를 재위기간으로 나눈 연간 화낸 횟수로 환산해 보았다. 그 결과, 태종, 영조 그리고 인조의 순서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북인과 서인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상이하여 2건의 기록을 모두 넣었다. 위의 표에는 없지만,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외세침략의 시달림을 받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은 실록을 통해 화를 낸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 왕들은 신하들에게 화를 낼 수 있을 만큼의 권력도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재위 15년 이상 왕들의 화낸 횟수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의 건수
재위 15년 이상 왕들의 화낸 횟수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의 건수

위에서 조사한 역대왕들의 화낸 기록만 살펴봐도 세종은 매우 온화했던 국왕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세종도 향 때문에 매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세종 31년(1449년) 6월 5일 세종은 태종의 서녀인 숙혜옹주淑惠翁主, 1413~1464)와 혼인한 성원위 이정녕李正寧에게 흥천사興天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령한다.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로 현재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다. 흥덕사는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명복을 비는 사찰인 만큼 왕실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사찰이었다. 따라서, 이런 중요한 사찰에서 지내는 기우제는 매우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원래 흥천사 기우제에는 내의원內醫院의 백단향白檀香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날 좌부승지 이사순은 내의원의 백단향이 아닌 향실의 향을 가져가는 큰 실수를 범한다. 

이에 세종은 크게 화를 내며 주변에 있는 내시 두명을 시켜 서로 비난하게 하고 책망하게 하기를 거의 예닐곱 차례나 하였다고 한다. 잘못은 이사순이 저질렀는데, 세종의 주변에 있던 내시들이 대신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세종이 크게 화를 내자, 이사순은 우부승지 이계전의 잘못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이계전이 병으로 먼저 퇴궐하면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화를 삭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것 같다. 세종은 이계전이 유학자라고 자부하면서 왜 기우제 준비에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않았는지 책망하면서 그가 병으로 먼저 퇴궐했음을 이제 알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세종의 화는 좌부승지 이사순에서 우부승지 이계전을 거쳐 다시 도승지 이사철로 옮겨갔다. 세종은 이계전이 병으로 퇴궐하였다면 그 윗사람인 도승지 이사철이 왜 향을 제대로 검사하지 못했는지 또 다시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향 배달사고는 이렇듯 세종을 크게 화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이렇게 크게 화를 낸 이유는 마지막에 있다. 세종은 기우제라는 것이 왕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일인데, 관리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리 소홀히 대하는지에 대해 화를 낸 것이다. 아무튼 기우제를 제대로 다시 지내기 위해 세종은 가장 믿는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 이유에게 내의원 백단향을 다시 받아서 흥천사로 가게 하였다. 

백단향 단면(사진 왼쪽) 및 절편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식품의약품안전처, 2022년
백단향 단면(사진 왼쪽) 및 절편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식품의약품안전처, 2022년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사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유학자들과 달리 평소 불교를 신실하게 믿었던 수양대군은 흥천사에 가자 마자 합장을 하고, 몸을 흔들며 불탑을 돌았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을 본인 뿐만 아니라 동행했던 대감감찰(사헌부 관리) 하순경에게도 억지로 같이 하도록 시켰다. 하순경은 나이도 있고, 수양대군의 위세에 겁이 났는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라했다. 또한, 수양대군은 도승지 이사철에게도 강권하여 결국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따라하게 되었다. 결국, 세종은 관리들로 하여금 흥천사에 가서 정성으로 기우제를 드리라고 명령했지만, 수양대군의 장난에 의해 불교 의식만 하게 된 것이다. 사헌부는 조선관리들의 자부심이 넘치는 기관이었는데, 하순경은 사헌부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부처에게 예를 다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불교행사를 둘러싼 향실의 소란 

임진왜란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정탁(1526~1605) 장군이 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무고로 국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울 때, 유일하게 그의 사면을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인물이다. 그는 명종 13년(1558년) 문과 급제 후, 한동안 한직인 교서관에서 근무를 했다. 어느 날, 명종의 모후인 대비(문정왕후)가 불공을 위해 향실에서 향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때 숙직을 하던 정탁은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까지 향을 내놓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명종 재위기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여인이었다. 이러한 정탁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이러한 소신있는 행동으로 인해 큰 명망을 받게 되었다. 향실의 향은 아무리 왕의 모후인 대비라고 하여도 마음대로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었던 그런 귀중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유명한 의병장 조헌(1544~1592) 역시 향실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화가 있다. 조헌은 과거에 급제한 후, 문벌에 막혀 좋은 관직 대신 한직인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관례에 따라 향실에서 근무하다가 불사佛寺에 향을 내려주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 조헌은 “입으로 성현의 글을 외면서 손으로 불공하는 향을 봉하라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조헌의 항명은 결국 괘씸죄로 이어져 의금부에 끌려가서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끝내 조헌의 고집이 이겼는지 곧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헌은 사대부 사회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조헌 역시 공공재인 국가의 향을 불교행사에 사용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이를 거부한 것이다. 

 


REFERENCES 
[1] 신병주, ‘역사이야기’ 조선 왕실의 상징, 종묘와 사직, 정책주간지 K-공감, 2015.01.19 
https://gonggam.korea.kr/newsContentView. es?mid=a10205000000&section_id=NCCD_ PUBLISH&content=NC002&news_id=EBC6D40 115D44203E0540021F662AC5F#none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 E006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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