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조선의 화장품과학자 빙허각 이씨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K-뷰티는 몇몇 나라에서만 인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종, 국가, 그리고 나이를 불문한 하나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2018년 영국의 BBC는 온라인 뉴스버전에서 ‘K-beauty: The rise of Korean make-up in the West’[1]를 제목으로 K-뷰티가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를 조망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외에도 많은 학자들과 애널리스트들은 K-뷰티의 급격한 성장에 대해 문화, 트렌드, 이미지 그리고 기술 우수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화장품과학자인 나는 K-뷰티의 성장 이면에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 한국의 많은 화장품기업 연구소, 대학교와 정부출연연구소들은 화장품의 기술발전을 위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정부에서도 K-뷰티의 기술 혁신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으로 K-뷰티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K-뷰티에 있어 현재의 과학기술 역량을 생각하던 중 우리 조상들의 화장품 관련 과학기술 역량과 활동이 궁금해졌다. 첫 번째 기고문에서 필자는 신라시대 승려 관성觀成의 연분鉛粉 기술을 소개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화장품 기술 교류 가능성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관성의 국적이 신라인지 일본 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약 1300년전에도 화장품 관련 기술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한·중·일 삼국 사이에 화장품 교류가 상당히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화장품 기술교류만이 아니라 화장품 기술과 관련된 인물과 고서적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과거에도 화장품을 연구한 과학자가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화장품 기술의 어떤 측면을 연구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다행히도 찾을 수 있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선시대 화장품 기술서라고 해도 가히 손색이 없는 『규합총서閨閤叢書』와 그 저자인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1759~1824)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빙허각憑虛閣은 ‘허공에 기대선 여자’라는 뜻의 아호雅號이다. (일부 미디어나 온라인에서 빙허각 이씨의 이름을 ‘이선정(李善貞)’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빙허각 이씨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허공에 기대선 여자』를 쓴 곽미경 작가가 상상해 만든 이름이다.) 

『규합총서』는 전체 5책으로 구성되었다. 1권은 음식 만들기인 ‘주사의酒食議’, 2권은 염색과 의복 만들기인 ‘봉임측縫紝則’, 3권은 농작과 원예, 가축치는 법인 ‘산가락山家樂’, 4권은 태교와 육아법, 구급방인 ‘청낭결靑囊訣’, 그리고 5권은 부적, 귀신을 쫓는 비법인 ‘술수략術數略’이다. 이 중 ‘봉임측’에는 몸단장과 화장법, 그리고 ‘청낭결’에는 얼굴을 트지 않게 하는 면지법이 소개되어 있다. 

『규합총서』는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1893~1950) 교수의 장녀인 정양완 교수가 1975년 국역본을 출판하였지만, 현재 절판되어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번 기고에서는 2013년 국내 등재지인 ‘한복 문화Journal of Korean Traditional Costume’에 소개된 논문[2]을 기초로『 규합총서』 중 화장품 및 화장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규합총서閨閤叢書』의 구성과 주요 내용. ⓒ필자 정리
『규합총서閨閤叢書』의 구성과 주요 내용. ⓒ필자 정리

 

미백법 

미백법과 관련하여 자소(차조기)가 소개되었다. 자소의 씨로 죽을 쑤면 피부가 희어지고, 몸이 향기로워진다는 내용이다. 

“자소는 마른 박토의 심그면 한편이 프로고, 비토의 심그면 배면이다. 븕은 거시 죠흐니 츈초의 심거, 사오월 오후의 옴기되, 뉵츅이 밟으면 못되니라. 그 닙흔 발포하는 약의 들고, 기장과 연계찜의 너흐면 마슬 돕고, 그 독을 업시하고 능히게 독을 프나니라. 그 씨로 죽을 쑤면 사람이 비백신향肥白身香하고 슐의 너흐면 강긔치담하고 이 씨기름은 유익한데 만코, 그 믈닌데 바라면 졔독을 하나니라.” 『규합총서』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자소는 마른 박토薄土(메마른 땅)에 심으면 한 편이 푸르고, 비옥한 땅에 심으면 뒷면이다. 붉은 것이 좋으니 이른 봄에 심고, 사오월 오후에 옮기되 동물들이 밟으면 자랄 수 없다. 그 잎은 발포하는 약에 들고, 기장과 연계찜(영계찜)에 넣으면 맛을 돕고, 그 독을 없애고 능히 독을 해독한다. 자소의 씨로 죽을 쑤면 사람이 살찌고 하얗게 되며 몸에서 향이 나고, 술에 넣으면 기를 강하게 하고, 담병을 치료하며, 이 씨의 기름은 유익한데 많고, 곤충의 물린 곳에 바르면 제독을 해 준다.” 

2016년 일본생약학회에서 청자소青しそ의 미백효능이 소개되었다[3]. 일본의 바스크린 기업은 청자소의 미백효과를 규명한 다음, 원물에 존재하는 로즈마린산Rosmarinic acid에 의해 표피세포에서 멜라노좀 흡수가 억제된다는 미백기작을 규명하였다. 자소의 미백효과가 현대적인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도 2019년 한국식품과학회지를 통해 자소엽 조다당 추출물의 멜라닌 생성 저해 및 미백효과에 대한 내용이 보고되었다[4]. 이 연구에서는 melanoma 세포인 B16F10 세포에 대해 세포독성이 없는 농도에서 자소엽 조다당 추출물의 세포 내 멜라닌 함량 및 tyrosinase 활성 저해를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자소의 미백효능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동안법 

규합총서 동안법에는 구기자가 소개되었다. 

“삼백구십세 얼굴빛이 열대 여섯 소년같으니… 

그 법대로 먹은지 백일만에 흰머리가 도로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해가 가되 늙지 아니한다.” 『규합총서』

 

현대의 화장품법 기준으로 본다면 이런 표현은 과대광고로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조금이라도 젊어보이고 싶은 여인들의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구기자는 ‘변백명목變白明目’이라 하여 얼굴색을 하얗게 해주고, 눈을 밝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이 저술한『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중국의 하서河西지방 여자들이 구기자로 만든 술을 먹어 젊게 보인다는 표현도 있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구기자에는 베타인Betaine 과 비타민C, 그리고 제아잔틴Zeaxanthin이라는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많이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성분은 간기능 보호와 피로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얼굴색을 하얗게 해주고 눈을 밝게 하는데 실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윤택법 

2010년대 K-뷰티에서는 광과 관련된 수많은 마케팅 사례가 봇물을 이뤘다. 물광, 꿀광, 윤광, 결광, 그리고 후광 등 광채와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 용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미롭게도 이런 피부광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200년 전 조선 여인들에게서도 동일했던 것 같다.『 규합총서』에는 복숭아 꽃인 ‘도화桃花’로 얼굴을 씻으면 얼굴이 빛나고 윤이 난다는 문장이 있다. 또한, 이 도화를 ‘백설白雪’ 이라고 부르는 물에 섞어서 세안하면 피부에서 광윤이 난다는 비법도 제시하였다. ‘백설白雪’은 동지冬至가 지난 제 3의 무일戊日, 즉 납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눈을 모아두고 빛이 없는 곳에 밀봉하여 만드는 물로 ‘납설수臘雪水’라고도 한다. 이 납설수는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에 채취하는 눈으로 만들어진 물로 수십 년이 지나도 온전하게 보존된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이 납설수에 어떤 과일이나 식물을 담가서 저장하면 상하는 일이 없다고도 소개하였다. 피부미용에 있어 물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재나 과거나 동일했던 것 같다. 

윤택법에는 도화와 백설 이외에 ‘홍화紅花’와 ‘동과 冬瓜’에 대한 소개도 있다. 홍화는 ‘잇꽃’이라 불리며, 색조화장을 위한 색소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규합총서』에는 이 홍화로 세안을 하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소개되고 있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홍화의 꽃은 독이 없고 매운 성질이 있으며 피의 흐름을 좋게 한다고 소개되었다. 따라서, 홍화로 세안을 하게 되면 혈액순환에 도움을 받고, 피부가 부드럽게 되면서 고와진다는 표현을 하게 된 것 같다. 동과는 동아라고 불리는 박과의 덩굴식물로 그 씨가 얼굴빛을 윤택하게 한다고 소개되었다. 『본초강목』에는 “동과가 사람을 옥처럼 깨끗하게 한다”고 적혀있고, 『동의보감』에도 “동과는 삼십일 얼굴이 하얗게 되고, 오십일로 손, 발이 모두 하얗게 된다”고 소개되었다. 

 

면지법面脂法

변변한 보습제가 없었던 조선시대, 특히 겨울철에 피부가 트는 것은 매우 큰 문제였을 것이다. 겨울철 피부터짐과 건조함의 이유는 아마도 차갑고 건조한 한반도의 기후특성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규합총서』에는 달걀을 28일 동안 술에 밀봉하여 담근 후, 얼굴에 바르는 비법이 소개됐다. 어쩌면 이것은 현대의 스킨, 토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술에 있는 에탄올 성분이 계란껍질에 있는 다양한 미네랄 성분을 추출하고, 이들이 피부에 작용하여 보습에 도움을 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달걀을 술에 담가 만든 처방이 얼굴을 트지 않게하는 예방적 대책이라면 이미 얼굴과 손이 터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규합총서』에는 돼지기름과 회화나무 꽃인 괴화를 섞어 바르는 비법이 담겨 있다. 돼지기름을 피부에 바르는 것은 그 옛날 읍루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중국의 역사가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부여의 동북쪽 1000여리 정도 떨어져있던 읍루에서는 겨울에 돼지기름을 피부에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5]. 지금이야 비건vegan, 친환경 이슈로 식물성 원료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우리 생활 주변의 모든 동식물들이 전부 피부미용의 원료였을 것이다. 

“겨울에는 얼굴이 거칠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 새지 않게 두껍게 봉하여 네 이레(28일) 두었다가 얼굴에 바르면 트지 않을뿐더러 윤지고 옥같아진다. 얼굴과 손이 터 피나거든 돼지기름에 괴화槐花(회화나무 꽃)를 섞어 붙이면 낫는다.” -『 규합총서』 

『본초강목』에도 “겨울에 신선한 계란을 침에 담가 칠일간 밀봉한 다음, 매일 저녁 얼굴에 바르면 기미와 여드름이 제거되고, 안색을 윤기나게 한다.” 라는 유사한 내용이 있어 계란을 이용한 피부미용법은 한국과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잊혀질뻔 했던 빙허각 이씨의 업적 

1939년 1월 30일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소개되었다. 

發見(발견)된 淸閨博物誌(청규박물지) 130년전 閨中婦人(규중부인)의 文化遺產(문화유산) 天文地理動植物等(천문지리동식물등) 한글로 초(草) 잡은 전서(全書, 백과사전) 延專生鄭徐兩君(연희 전문학교 정군과 서군)이 長湍(장단)에서 發見(발견)한 純祖(순조, 재위: 1800-1834) 때 完山李氏大著 (완산(전주)이씨의 작품)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는 140쪽 분량의 4권짜리 책으로 천문, 지리, 동물과 식물, 제도, 생리, 관복 등 조선시대 학문전반에 걸쳐 고증실학의 방법으로 저술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규합총서』가 아녀자들의 필독서라고 한다면,『 청규박물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백과사전이니 그 학문적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역사적 가치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초고가 모두 한글로 작성되었고, 그 저자가 바로 규방부인인 빙허각 이씨였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 중 청규淸閨란 ‘깨끗하고 조촐한 아녀자가 거처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바로 저자인 빙허각 이씨를 지칭한다. 그리고, 박물지博物誌는 지금의 백과사전에 해당한다. 즉, 빙허각 이씨가 직접 저술한 조선시대 한글판 백과사전인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75
『후한서(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75

『청규박물지』를 발견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 3학년 학생인 서정만徐廷萬과 민영규閔泳珪는 스승인 정인보鄭寅普(1893~1950) 교수 문하에서 조선의 역사와 복식사服飾史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료와 문헌을 찾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던 중 1939년 1월 17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서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의 유명한 실학자 보만재 서명응保晩齋 徐命膺(1716~1787)의 손자며느리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청규박물지』 초고를 발견하였다. 빙허각 이씨가 살던 시대는 실학이 주자학에 대한 이단으로 몰리면서 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따라서, 집안 내에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왔었는데, 서명응의 후손이었던 서연범徐延範의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를 발견했다는 신문 기사(붉은 테두리) ⓒ조선일보 (1939년 1월 30일 사회면)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를 발견했다는 신문 기사(붉은 테두리) ⓒ조선일보 (1939년 1월 30일 사회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두 학생은 정인보 교수로부터 빙허각 이씨 저술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찾기 위해 3년 동안 전국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서정만 학생이 경기도 장단군 진 서면에 보만재 서명응의 종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더니 과연 곳간에 먼지가 덮힌 채 있었다고 하였다. 이 책은 두 학생과 정인보 교수가 필사 후,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라고 하였다. 같은 인터뷰에서 정인보 교수는 『청규박물지』는 서양의 대영백과사전에 필적하는 조선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당시 정약용이 남자로서 실학의 패두牌頭(우두머리)라면 규수로서 실학의 패두는 빙허각 이씨라고 극찬하였다. 조선학에 대한 고문헌이 적은 상황에서 이 책의 발견은 정말 대단한 성과이며, 서정만과 민영규 학생은 조선복식사를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인데, 그들 손에 이런 귀한 문헌이 발견된 것은 학계의 큰 성과라고 하였다.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역사학자로 수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또한, 이 문헌을 발견한 학생 중 한 명인 민영규(1915~2005)는 1945년부터 35년간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국사, 불교사, 양명학, 서지학 등의 분야에 헌신한 국학자였다. 

1939년 1월 30일 조선일보에 기사가 나온 다음 날인 1월 31일에는 동아일보에도 빙허각 이씨 관련 기사가 나온다. 동아일보에는『 청규박물지』 뿐만아니라 빙허각 이씨의 저술 전집인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다. 빙허각전서는『 규합총서閨閤叢書』,『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 그리고『 빙허각고憑虛閣稿』의 3권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규합총서』는 주식酒食, 봉임縫紝, 산업産業, 의복醫卜 등 가정 실용의 내용에 대한 책이다.『 청규박물지』는 천문지리, 세시 초목을 포함한 8개 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빙허각고』에서는 한글 자작시와 이의 한문 대역漢文對譯 110수, 묘문墓文 등 순수 한글로 된 것들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빙허각전서 목록
빙허각전서 목록

동아일보 역시 『청규박물지』 발견과 관련해 다양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먼저 이 책을 발견한 두 학생의 스승 위당 정인보는 이 책의 발견과 관련된 재미있는 후일담을 소개해 주었다. 이 책을 발견한 학생 중 한 명인 서정만은 사실 빙허각 이씨의 방손傍孫(방계 혈족의 자손)이었다. 서장만과 친구인 민영규는 이 책을 찾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 노력의 덕분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된것이다. 

신조선사新朝鮮社의 권태휘는 이 책을 간행하겠다는 뜻과 함께 빙허각 이씨의 저서는 정약용 전집인 『여유당전서』와 함께 조선 문화계의 쌍벽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대 정약용 연구의 권위자였던 창해 최익한은 평론을 통해 빙허각 이씨는 당시 양반으로 저서 내용 역시 중류층 이상의 생활상이겠지만, 어찌되었건 당시 유교사회에서 억압받던 부인의 글이면서 동시에 천대받던 언문(한글)으로 쓰인 저서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 있어 매우 훌륭한 읽을 거리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허난설헌이나 이원 같은 여류 문학가는 있었지만, 이렇게 실용실학 분야의 지식이 풍부하고, 계몽적인 서적을 쓴 사람은 처음이라고 평가하였다. 가히 찬사에 가까운 평론이라고 하겠다. 『청규박물지』의 발견은 이렇듯 일제강점기라는 우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많은 국학자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청규박물지』 간행과 관련해서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1939년 이 책이 발견된 이후 바로 간행되지는 못했다. 책을 간행하기로 했던 신조선사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간행 이후, 『청규박물지』 간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이 되었고, 몇 년 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가 일어나고 며칠 후 위당 정인보가 북한으로 납북되는 사건이 있었다. 게다가, 민영규 역시 전쟁의 혼란속에 『청규박물지』 원고를 분실하게 된다. 다행히 2004년 2월 4일 서울대 국문과 권두환 교수가 동경대 도서관의 오쿠라 문고에서 청규박물지의 또 다른 필사본을 찾아내어 ‘빙허각전서’는 역사속으로 잊혀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청규박물지』 발견과 관련한 신문 기사(붉은 테두리) ⓒ동아일보 1939년 1월 31일 조간 2면
『청규박물지』 발견과 관련한 신문 기사(붉은 테두리) ⓒ동아일보 1939년 1월 31일 조간 2면

한편,『 규합총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정인보 교수와 그의 딸인 국문학자 정양완 여사의 노력 덕분이다. 1971년 7월 6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정양완 여사는 『규합총서』의 숨겨진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일제강점기에 정인보 교수는 『규합총서』 필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상황과 6.25 전쟁 과정에서 납북되면서 정인보 교수는 『규합총서』 국역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다행히 정인보 교수의 부인이 이 귀중한 책들을 잘 간직해 두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국문학을 전공한 정양완 여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규합총서』 국역에 매진 했고, 마침내 『규합총서』 국역본은 1975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조선 후기에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는 K-뷰티의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화장품 원료와 제조방법, 피부효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 기술서이다.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 서문에서 ‘총명함은 무딘 문장만 못하다’라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리며, 기록했다고 썼다. 
오늘날 K-뷰티의 발전은 조상들의 기록과 연구의 결과물이 아닐까. 
 

빙허각 이씨의 생애 

빙허각 이씨(1759~1824)의 생애는 그의 남편인 서유본에 대한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5년부터 시작된 율곡학 사업단 자료에는 서유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소개되어 있다[6]. 

빙허각 이씨는 1759년 세종대왕의 17남인 영해군의 후손 문헌공 이창수(1710~1777)의 딸로 태어났다. 『태교신기』를 저술한 사주당 이씨가 그녀의 외숙모이기도 하다. 그녀는 1773년(영조 49년) 15세의 나이로 12세인 달성서씨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혼인한다. 서유본은 조선 후기 유명 한 실학자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저자 서유구(1764~1845)의 친형이기도 하다. 서유구는 어린시절 형수인 빙허각 이씨에게서 글을 배웠다고 전해졌으니 그녀의 학문은 당대 남성들과 견주어봐도 뒤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서유본과 빙허각 이씨는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는데, 장성한 자식은 1남 2녀였다. 서유본은 1805년 44세의 늦은 나이로 음서를 통해 벼슬에 나가지만, 이듬해인 1806년 안동 김씨에 의해 벽파들이 박해를 박을 때, 숙부인 서형수가 파직당하면서 가문의 몰락을 맞이한다. 서유본 역시 자신에게 닥쳐올 후환을 피하기 위해 사직을 하고, 서울 사대문 밖인 동호 행정(지금의 용산 부근)에서 아내 빙허각 이씨와 함께 차밭을 일구며 생활을 꾸려간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서유본으로 인해 갑자기 살림이 궁핍해지자 빙허각 이씨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밭일을 하며 틈틈히 자신의 생활지식들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본디 서유본의 집안은 실학자 집안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실학서적들이 많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의 서재 ‘죽서재竹西齋’, 서유본의 서재 ‘불속재不俗齋’, 그리고 시동생 서유구의 서재인 ‘태극실太極室’에는 수많은 실학서적들이 있었고, 이러한 책들은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게 되어 가정형편이 불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위대한 책의 저술동기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 『규합총서』는 1809년 탄생하게 된다.『 규합총서』 서문에서 빙허각 이씨는 다음과 같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서술하였다. 

“나는 동호東湖의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을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에 나가 옛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에 묻혀 있는 모든 글들을 구해 보았다. 손길 닿는대로 펼쳐보고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총명함은 무딘 문장만 못하다’라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버렸을 때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을 지었다.” - 『규합총서』 서문 中 빙허각 이씨 글 

빙허각 이씨의 절명사(絶命詞) ⓒ정창권, 조선프리미엄, 2015년 6월 29일
빙허각 이씨의 절명사(絶命詞) ⓒ정창권, 조선프리미엄, 2015년 6월 29일

한편,『규합총서』 서문에는 남편 서유본의 글도 함께 있다. 부인이 책을 쓰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 남편인 서유본은 부인의 책 서문에서 부인의 학문적 식견을 칭찬하며 저서의 이름도 직접 지어준다. 어쩌면 이들 부부는 학문적으로도 동지였으며, 부부 사이의 금슬도 매우 좋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내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시골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더욱이 초목,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내가 그 책 이름을 지었는데 『규합총서』라고 하였다.” - 『규합총서』 서문 中 서유본 글 

하지만 서유본은 1822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남편의 사망 이후, 빙허각 이씨는 절명사絶命詞(임종시 남기는 말 또는 문장)를 짓고, 모든 인사를 끊은 뒤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은 채 자리에 누운지 19개월만인 1824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빙허각 이씨의 절명사는 그의 시동생인 서유구가 지은 부인의 묘지명인 嫂氏端人 李氏墓誌銘(수씨단인이씨묘지명)에 잘 나타나 있다. 

서유구의 묘지명에 따르면, 형인 서유본과 형수인 빙허각 이씨는 합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묘의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이 되는 단서는 시동생인 서유구의 무덤(휴전선 남쪽,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금릉리산 204)과 증조부인 서명선의 무덤(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산 16번지), 그리고 1939년 조선일보의 『청규박물지』 발견기사에서 나온 후손의 주소(경기도 장단시 진서면) 정도이다. 이를 종합하면 아마도 휴전선 부근인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또는 진동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시대에 빙허각 이씨가 남긴 업적은 결코 적지 않다. 특히, K-뷰티의 기술적 측면에서 본다면 화장품 원료와 제조방법, 그리고 피부효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기술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K-뷰티의 발전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이런 세심한 기록과 연구의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 

 

 


REFERENCES 
[1] Mary-Ann Russon, K-beauty: The rise of Korean make-up in the West, BBC News, 2018.10.21.https://www.bbc.com/news/ business-45820671 
[2] 우미옥, 이애련, 전혜숙, 『규합총서』에 기록된 우리나라 전통 피부미용, 한복문화Journal of Korean Traditional Costume, 16(1) 145-160 (2013) 
[3] 바스크린BATHCLIN, 제63회 일본생약학회 (2016) https://www.bathclin.co.jp/rd/news/2016/ 1012_2346 
[4] 조은지, 변의홍, 자소엽Perilla frutescens Britton var. acuta Kudo 조다당의 멜라닌 생성 저해 및 미백효 과, 한국식품과학회지, 51(1) 58-63 (2019) 
[5] 범엽范曄, 후한서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75 (동북 아역사재단 국역자료) http://contents.nahf.or.kr/ item/compareViewer.do?levelId=jd.k_0003_00 75_0030_0010&title=d|k#self 
[6] 임태홍, 율곡학파 인물이야기 35 서유본 
http://yulgok.geeo.kr/wordpress/2016/01/08/ character-3-2_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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