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조선의 왕실 화장품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2020년 9월 22일. 공중파 3사 및 종합편성방송사, 그리고 주요 일간지 문화란에는 ‘화협옹주 화장품의 재탄생’이라는 큼지막한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주요 내용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진행된 ‘전통 화장품 재현과 전통화장문화 콘텐츠 개발’에 대한 업무협약MOU’이었다. 그저 흔한 업무협약일 뿐인데, 왜 많은 매체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지 의아했다. 기사가 나간 이후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는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특히, 화협옹주 전통화장품 재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온라인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전통화장품과 왕실화장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관련 SNS 콘텐츠들은 순식간에 조회수 몇 만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뜨거운 분위기에 필자를 포함한 업무협약 행사 담당자들은 흥분을 넘어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야말로 행복한 걱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22년 12월 7일. ‘화협옹주’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왕실화장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자기화장품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2년전의 결의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화협옹주 화장품은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지지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가 화협옹주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19년 10월 1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된 ‘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 세미나에서 소개된 ‘화협옹주묘 출토 화장품 보존연구’였다. 2016년 경기도 남양주시와 고려문화재연구원은 화협옹주 부부의 묘가 이장되기 전 최초의 매장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 때 화협옹주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화장품, 거울, 빗, 청화백자와 함께 영조가 직접 쓴 394자에 걸친 묘지석도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출토물 중 조선시대 화장품 내용물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용재 교수의 추가 연구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게되었다. 

2022년 12월 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화협옹주 도자에디션 출시 공개 행사 후 개발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국립고궁박물관
2022년 12월 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화협옹주 도자에디션 출시 공개 행사 후 개발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출토부장품 중 원통형 청화백자합에서는 백색가루가 딱딱하게 고화固化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전통대 정용재 교수 연구진의 분석 결과, 백연광탄산납, cerussite의 주성분인 납이 약 55%로 가장 많았고, SiO2와 MgO가 각각 약 26%와 17% 정도로 분석되었다고 한다. 전통화장품인 백분이 납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납이 함유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일본의 에도시대 때에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백분이 유행했다고 한다. 에도시대 초기의 백분은 납이 아닌 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경분輕粉이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내 수은 생산력의 감소로 인해 경분이 사라지고, 대신 납이 주성분인 연분鉛粉이 유행하게 되었다. 물론, 경분이나 연분이나 피부에 해로운 것은 매한가지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장품 출토물(왼쪽)과 화협옹주 부부 묘 ⓒ국립고궁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화장품 출토물(왼쪽)과 화협옹주 부부 묘 ⓒ국립고궁박물관

두 번째인 분채 자기발에서는 굳어진 적색가루가 발견되었다. 분석 결과, 이것은 진사cinnabar의 주성분인 수은과 황이 각각 31% 및 10% 정도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메이크업 화장품이었던 연지의 주성분으로는 홍화잇꽃와 진사가 있었다. 이 중 진사가 홍화보다 발색력이 우수하였지만, 수은과 황이 함유된 진사의 경우, 지금의 안전성 기준으로 본다면 위험천만한 제품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홍화의 경우, 비록 발색력은 떨어지지만, 안전성은 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홍화 역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가격 이슈였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홍화에서 뽑아낸 적색색소의 생산수율이 1%도 안되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다는 기록도 있었다. 

세 번째 청화백자 칠보무늬팔각호에서는 pH 2~3 정도로 분석된 산성의 액체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 액체에는 황개미 수 천 마리가 머리, 가슴 및 배로 분리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왜 황개미들이 화장품 내용물에 들어있었을까? 많은 추론이 있었다. 2019년 개최된 세미나에서는 이에 대해 황개미를 식초에 담가 놓은 이 액체성분은 아마도 현대의 피부 트러블 케어용 화장품과 유사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실제로 지금의 여드름 관련 화장품 중에는 약산성의 화장품들이 많이 시판되고 있다. 어떻게 조선시대에 이러한 비법(?)을 알고 있었을지 그저 신기할 뿐이다. 화협옹주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 황개미 화장품의 존재를 통해 사람들은 화협옹주가 피부 트러블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을 하게 되었다. 

네 번째 청화백자합에서는 밀랍으로 추정되는 갈색의 고체 내용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오일 성분도 분석되었다. 이 내용물은 아마도 오늘날의 크림 또는 연고와 같은 제형이 아니었을까 추정이 된다. 이 고체 내용물은 무덤속에서 2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수분이 날아가고, 남아있는 오일성분과 밀랍들이 굳어져 이러한 형태로 발견된 것이 아닐까 추정이 된다. 

화협옹주 묘 발굴 주요 도자기와 화장품 내용물. 1) 원통형 청화백자합과 고화固化된 백색가루, 2) 분채 자기발과 적색가루, 3)청화백자 칠보무늬팔각호와 개미가 함유된 액체, 4)청화백자합과 밀랍함유 고체 출토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발굴 주요 도자기와 화장품 내용물. 1) 원통형 청화백자합과 고화固化된 백색가루, 2) 분채 자기발과 적색가루, 3)청화백자 칠보무늬팔각호와 개미가 함유된 액체, 4)청화백자합과 밀랍함유 고체 출토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발굴 청나라 경덕진 도자기들. 1. 청화백자 연꽃넝쿨무늬 합, 2. 청화백자 철쭉칠보 무늬 합, 3. 청화백자 국화넝쿨무늬 합, 4. 청화백자 송죽무늬 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발굴 청나라 경덕진 도자기들. 1. 청화백자 연꽃넝쿨무늬 합, 2. 청화백자 철쭉칠보 무늬 합, 3. 청화백자 국화넝쿨무늬 합, 4. 청화백자 송죽무늬 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발굴 색회 등나무무늬합(일본 아리타, 에도시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 묘 발굴 색회 등나무무늬합(일본 아리타, 에도시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한편, 출토된 도자기 중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은 앞서 황개미가 발견되었던 청화백자 칠보무늬팔각호 1점뿐이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경덕진 도자기로 추정되는 8점과 일본 아리타 도자기로 추정되는 3점이었다. 당시 최고위 층이었던 왕실 여인 화협옹주는 국산보다 좀 더 화려하고 희귀한 제품이었을 중국산, 일본산 도자기를 선호했던 것 같다.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희경(1745~1805)과 정약용(1762~1836)은 조선의 도자기들이 중국에 비해 기술이 낙후되고, 검소검약 사상으로 인해 고급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화협옹주가 청나라 도자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덕분이었을 것이다. 공식적인 외교사절인 연경 사행과 이들을 따라 청과의 무역을 하였던 민간업자들에 의해 조선은 청나라의 다양한 제품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같이 출토된 일본산 도자기는 규슈 지역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오채자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본의 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그 기술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금과 은으로 덧칠하는 사치스러운 기법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도자기 기술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실제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일본 아리타 도자기에도 금박으로 등나무가 그려졌다가 박락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화협옹주(1733~1752)는 조선 시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1735~1762)의 친누이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1735~1816)의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친국을 하면 반드시 사도세자에게 들러 “밥 먹었느냐?”라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 후, 대답을 들으면 자신의 귀를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 집을 향해 버렸다고 한다. 당시 귀를 씻는 것은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사도세자는 누이인 화협옹주를 대할 때마다 “우리 남매는 씻는 자비(씻기 전의 준비과정)로구나!"라며 웃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중록』의 기록만 본다면 화협옹주는 아버지인 영조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인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영조의 묘지석을 보면 반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1752년(영조 28년) 11월 27일 화협옹주가 사망하자 영조는 직접 그녀의 묘지석 제문을 지었다. 이 묘지석 제문의 내용을 통해 영조가 화협옹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딸을 잃고 슬퍼하는 영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화협옹주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53년 2월 2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삼정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문란을 막기 위해 세운 기구인 이정청釐正廳의 당상관 박문수는 화협옹주의 외상에 대해 영조에 보고하였다. 그의 보고내용은 하급관리직 서원書員인 전세범이 화협옹주의 외상값에 대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원망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처벌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화협옹주의 외상값인 현목玄木, 무명, 면포 20동(同, 1동은 50필에 해당)을 즉시 화협옹주방에 보내어 외상값을 값아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현목 20동, 즉 면포 20동은 면포 1000필에 해당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조선시대 면포는 곡식, 동전과 더불어 조선의 세금 수취 및 재정 운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문화재청 자료[1]에 따르면, 조선시대 쌀 1석은 동전 7냥 또는 면포 3.5필로 교환되었다고 한다. 면포 1000필은 쌀 약 286석이고, 쌀 1석이 144Kg이므로 면포 1000필은 결국 쌀 4만1184Kg에 해당한다. 한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KAMIS 자료[2]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소매가 기준으로 쌀 20kg 평균 가격은 약 5.1만원 정도이다. 조선시대 물가의 변동을 무시한다면, 조선시대 쌀 1석은 현재 가치로 약 36만7200원이고, 따라서 1Kg 단가는 약 2550원 정도이다. 복잡한 계산이지만, 화협옹주의 외상값인 면포 20동 (=면포 1000필, 쌀로 환산하면 4만1184Kg)은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본다면 약 1억원이다. 그런데, 영조는 박문수가 요청한 현목면포 20동 대신 55동(현재 가치로 약 2.75억원 정도)를 보낸다. 영조는 확실히 화협옹주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화협옹주 묘지석 (https://www.gogung.go.kr/specialView.do?cultureSeq=00020289CY)
화협옹주 묘지석 (https://www.gogung.go.kr/specialView.do?cultureSeq=00020289CY)
1753년(영조 29년) 2월 22일 조선왕조실록 기사.
1753년(영조 29년) 2월 22일 조선왕조실록 기사.

 

공주 및 옹주 궁방의 면세전 보유현황(1860, 비변사등록).
공주 및 옹주 궁방의 면세전 보유현황(1860, 비변사등록).

또한, 비변사등록 1860년 (철종 11년) 3월 4일에 는 조선시대 각 궁방의 면세전 결수에 대한 기록3) 이 있다. 궁방은 국왕의 혈육인 대군, 군, 공주, 옹주 그리고 왕비, 후궁 등에게 경제적 재원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별 설치된 왕실기관이다. 조선시대 궁방 중 공주와 옹주들의 재산 내역을 정리한 1860년 비변사 등록에서는 청연군주에 이어 화협옹주 궁방 면세전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화협옹주 사후 100년 후의 재산상태이기 때문에 부왕인 영조의 사랑과 총애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생전에 상당한 재산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참고로 조선시대 1결의 면적은 인조 12년(1634년) 이후 1등전 1결의 넓이가 1만809㎡였다. 따라서, 1860년 화협옹주 궁방의 면세전은 약 1138만3174㎡로 약 345만평 정도이다. 여의도 면적이 약 87만7000평이니 화협옹주 궁방의 면세전은 여의도 면적의 약 4배 정도이다.

도자기 및 화장품 유물이 출토되기 전까지 화협옹주는 역사속에서 잊혀진 왕실여인이었을 뿐이었다. 비록 『조선왕조실록』과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그녀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묘로부터 출토된 유물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그녀의 화장품을 모티브로 하는 현대적인 도자기화장품이 출시되면서 화협옹주는 주목을 받고있다. 270여년 전 조선왕실 여인의 화장품스토리가 새로운 K-뷰티 아이템으로 부활한 셈이다. 지금껏 화장품에서의 스토리텔링은 원산지, 원물, 소재, 그리고 제형기술처럼 내용물 위주의 접근법이 대부분이었다. 화협옹주 화장품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는 스토리텔링이기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화협옹주 이외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는 어쩌면 새로운 K-뷰티 중흥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REFERENCES

[1].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32114&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
[2]. https://www.kamis.or.kr/customer/price/product/period.do?action=yearly
[3].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bb&levelId=bb_247r_001_03_0060&types=r
[4]. 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 국제학술대회 자료집(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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