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과학자가 쓴 ‘K뷰티 히스토리’ ⑦ <上>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명품(名品). 사전적 의미는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그 상품적 가치를 인정받아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으로 각각의 상품군마다 저마다의 명품이 있다. 명품은 분수나 생활의 필요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넘치는 물품을 이르는 사치품과 달리 쓰인다. 명품이냐 사치품이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과거에도 명품이 있었을까? 특히, 예(禮)라는 정신가치를 숭상하던 유교사회 조선에서도 명품이 존재하였을까? 게다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불평등한 유교문화 속에서 여성들 또한 명품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여인들 역시 다양한 명품들을 소비하고 있었다. 다만,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질서와 가장의 품계(品階)에 따른 차별적인 사용을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과 품계를 뛰어넘어 여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명품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가체(加髢)’이다. 

가체는 여인의 머리장식으로 치장을 위해 가발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을 의미한다. 가체는 다리머리 또는 다리꼭지라고 불리우며, 줄여서 다리(髢), 다래, 다레, 월자(月子), 그리고 월내(月乃)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가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늘고 긴 머리카락의 묶음인 다리(髢)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다리를 여러 개 이어붙여 풍성한 머리장식을 하는 것이 바로 조선의 여인들이 누릴 수 있던 몇 안 되는 사치 중 하나였다. 위로는 궁중으로부터 아래로는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가체는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던 머리장식이었다. 가체는 그 희소성으로 인하여 당대의 명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다리(髢)는 모두 사람들의 머리카락 묶음이었다. 지금은 기술발전으로 인해 인공모발도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모(人毛)가 유일한 재료였다. 하지만, 유교사회 조선에서 사람의 모발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학서인 효경(孝經)에 따르면,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몸과 머리카락은 부모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이런 유교사회에서 사람의 모발을 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체는 조선시대 매우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매우 높았다. 제주대학교 강문종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체의 가격이 비싼 경우에는 장신구를 포함하여 700냥까지 치솟은 적도 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한양의 11칸 초가집 가격이 110냥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가체 하나의 가격이 초가집 6~7채에 해당할 정도이니 과연 대단한 명품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1]. 

가체의 기원은 언제였을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신당서(新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편에 신라의 여인들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틀어올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가체의 기원을 신라로 보고 있다[2]. 또한, 삼국사기 성덕왕 22년(723년)에는 신라가 당나라로 보낸 예물 가운데 미체(美髢, 가체)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1월 16일 기록에는 가체를 고려때부터 시작된 몽고의 제도라는 견해도 남아있다. 어떤 기록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가체가 우리 조상들의 삶에 있어 매우 큰 부분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및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조선의 명품 가체(加髢)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궁중여인들의 가체 

조선 개국 초기 명나라는 진귀한 토산품과 함께 공녀(貢女) 등 다양한 요구를 하였다. 공녀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요구로 시작되었지만, 조선 초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공녀 출신으로 명나라 5대 황제인 선덕제(1399~1435, 재위: 1425~1435)의 후궁까지 올라간 공신부인 한씨(恭愼夫人 韓氏, 1410~1483) 라는 여인이 있었다. 한씨는 한확의 누이로 성종의 모후이자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1437~1504)의 고모이기도 하다. 공신부인 한씨는 조선을 그리워하며 조선의 토산품들을 자주 요청한 적이 있다. 성종 8년(1477년) 8월 17일, 한씨의 조카인 한치례(1441~1499)는 성절(聖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의 축하사절로 명나라로 떠났다. 이 때, 한치례는 한씨를 위해 다양한 선물을 가지고 갔는데, 그 가운데 수체(가체)가 50개였다. 한씨에게 수체는 머리치장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리운 고국을 떠올릴 수 있는 물품이기도 했을 것이다. 

궁중에서 사용되던 가체에는 다리(髢)가 몇 개 정도 사용되었을까?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인조 5년(1627년) 9월 29일,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자빈을 승지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정한다. 그 후, 세자빈의 혼례 준비를 담당하던 가례도감에서 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한다. 

가례도감에 따르면, 세자빈 가체를 위해 필요한 다리꼭지는 원래 40단이었다. 이 중 30단은 함경도, 그리고 나머지 10단은 제주도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함경도에서는 아직 바치지 않았고, 제주도는 실수로 과거 기축년의 기준을 적용하여 10단 대신 20단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례도감에서는 제주도에서 더 올라온 10단에 대해 다시 되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궁궐로 반입하겠다고 보고를 하였고, 인조는 이를 승인한 것이다. 이것은 가체가 그만큼 귀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의 학술연구용역으로 부경대학교에서 수행한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이라는 연구보고서가 있다[3]. 이 연구에서는 현존하는 조선왕실의 가례의궤 기록을 통해 역대 조선 왕비들과 왕세자빈들의 체발(가체)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장 크게 사용된 가례식 때의 가체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1624~1688)가 사용한 68단 5개였다. 또한, 왕세자빈의 경우에는 현종, 숙종 및 경종이 각각 세자시절 혼인했던 세자빈들로 48단 5개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다리꼭지를 가지고 높은 가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리꼭지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잠(醫)이라 불리우는 비녀가 필요하였다. 장렬왕후 조씨의 가례식에서는 다리꼭지 68단 5개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려 54개의 비녀가 사용된 기록도 있다. 

경종(1688~1724, 재위: 1720~1724)의 비인 선의 왕후 어씨(1705~1730)의 세자빈 가례의궤에서는 원래 준비하려고 했던 체발의 수량을 줄인 흔적이 남아있다. 선의왕후 어씨는 숙종 44년 (1718년) 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과 혼인을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경종선의왕후 가례도감의궤 에 따르면, 원래 준비하려고 했던 체발의 수량은 68단 5개였다. 하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의 재가를 받아 20단 5개를 줄여 최종적으로 체발 48단 5개를 준비한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이 체발은 전량 호조(戶曹)에서 복정(卜定: 조선시대 해당 관청에서 비정기적으로 거두던 공물)이라는 방식을 통해 함경도에 부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자빈의 체발을 준비했어야 하는 함경도 백성들은 갑작스러운 공납에 많이 힘들어 했을것 같다. 

2021년 3월 7일 YTN 뉴스에 따르면, 사극에서 사용되는 큰 가체 하나가 대략 3~4Kg 수준이고, 작은 가체와 각종 장식구를 더하면 무게가 무려 5Kg이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와 지금의 가체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가체의 무게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가체의 무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목뼈가 부러져 죽은 한 부자집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염집 며느리의 가체가 이 정도였다면 왕실여인의 가체 무게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한 무게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현세자빈 가례식 관련 가체의 진상 현황 보고 기(인조 5년(1627년) 10월 6일) ⓒ승정원일기
소현세자빈 가례식 관련 가체의 진상 현황 보고 기(인조 5년(1627년) 10월 6일) ⓒ승정원일기
세자빈 혼례 때 사용할 가체에서 20단 5개를 줄이라는 숙종의 지시가 쓰인 경종선의왕후 가례도감의궤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자빈 혼례 때 사용할 가체에서 20단 5개를 줄이라는 숙종의 지시가 쓰인 경종선의왕후 가례도감의궤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중국 사신들도 탐내던 조선의 가체 

세종 7년(1425년) 2월 2일, 세종은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미체(美髢, 가체)를 국고로 구입하여 한양으로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실록에 따르면 녹흑색(綠黑色)으로 연하고 가늘며 극히 긴 것을 구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인기있던 가체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이듬해인 세종 8년(1426년) 3월 15일, 다시 다리꼭지(髢)에 대한 당부의 명령을 내린다. 역시 녹색이 날 정도로 검고, 부드럽고 가늘고 아주 긴 것을 구하라는 매우 상세한 지시를 내린다. 

세조 2년(1456년) 6월 23일에는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인 윤봉(尹鳳)을 위해 가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긴 월자(月字, 다리꼭지)인 세발장체(細髮長髢) 50개를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의 가체는 당시 명나라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다음해인 세조 3년(1457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과 고윤(高閏)은 조선의 특산물들과 함께 가체를 요구하였다. 특히, 고윤(高閏)은 가체를 요구하면서 함께 온 명나라 정사(正使)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아마도 고윤(高閏)에게 있어 가체는 진귀한 사치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들의 가체에 대한 잦은 요구는 아마도 조선 조정에 있어 큰 부담을 준 것 같다. 세조 14년(1468년) 6월 9일 기록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가체는 널리 구하여 얻는대로 보내지만, 그 폐단이 없도록 힘쓰라는 특별한 당부가 보인다. 가체에 대한 폐단을 이미 조선 조정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명나라 사신들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 

중국 사신들의 끝없는 가체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성종 11년(1480년) 4월 11일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매번 여인의 수체(首髢, 가체)를 요구하니 아예 미리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아마도 이때부터 가체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약 60년 전인 세종시대에는 가체를 구할 때 녹흑색이고, 가늘고 연하며 무엇보다 긴 다리꼭지를 구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하지만, 성종 11년의 기록에는 많고 적은 것에 구애되지 말고 구하는 대로 진상하라는 말이 있다. 즉, 다리꼭지를 구하는 상황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산군 9년(1503년) 1월 23일, 연산군은 중국 사신 선물을 이유로 체자(髢子, 다리꼭지) 600개를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아울러 공주가 결혼하여 궁을 떠나는 출합(出閤) 행사 때 사용할 체자 200개를 별도로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중국사신에게 선물할 체자도 빠듯한데, 공주의 체자까지 구해야 하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고통이 눈에 선하다.

중국 사신들의 가체 사랑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조정 역시 이들을 대접해야 했기 때문에 가체를 둘러싼 사신대접은 계속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숙종 38년(1712년) 10월 20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체발(髢髮, 가체)을 원하니 100개를 선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9일 후인 10월 29일 청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전달할 가체의 수량을 100개에서 70개로 줄이자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초기 수백개에 달하던 명나라 사신들에 대한 가체 선물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백성들의 고충은 크게 줄지 않았을 것이다. 

영조 14년(1738년) 2월 21일. 어쩌면, 가체에 대한 중국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가 드디어 끝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은 황제의 명령으로 원래의 선물만 받고 따로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전 사신들과 달리 이번 사신은 다리(髢) 두 묶음만 구하여 간 것이다. 

당대 사치스러운 가체의 문제를 지적한 이덕무의 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 30 중 사소절(士小節) 부의(婦儀)편.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당대 사치스러운 가체의 문제를 지적한 이덕무의 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 30 중 사소절(士小節) 부의(婦儀)편.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명나라 사신에게 가체를 선물한 기록 (세조실록, 세조 2년(1456년) 6월 23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명나라 사신에게 가체를 선물한 기록 (세조실록, 세조 2년(1456년) 6월 23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산군의 가체 사랑 

사치향락의 아이콘인 연산군도 가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먼저 연산군 8년(1502년) 1월 14일, 연산군은 자신의 딸인 휘순공주(1491~?)의 길례를 위해 다리 150개를 2월까지 준비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연산군의 갑작스런 명령에 담당 관리들은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또한, 이듬해인 연산군 9년(1503년)에는 다리 1000개를 가장 긴 것으로 진상하라는 명을 내린다. 

연산군 11년(1505년) 2월 13일, 흥청악(興淸樂)에서 일하던 종 금장(金藏)이 옥쌍가락지와 수체(가체)를 훔친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흥청악은 연산군 10년(1504년)에 신설된 궁중 음악기구로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에게 악기, 노래, 춤을 교육받아 연산군 앞에서 기예를 펼치는 궁중기구였다. 흥청악의 흥청들은 전국에서 재주와 미색이 뛰어난 기녀들로 선발되었다. 처음에는 30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500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흥청들은 항상 의복과 몸단장에 신경을 써야만 했고, 화장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부모를 처벌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12년(1506년) 4월 1일). 

연산군의 사치는 점점 더 극에 달하고 있었고, 같은 달 2월 24일에는 체자(다리) 1만벌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또한,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길이가 3자(현재의 길이로 약 93cm)나 되는 체자 5만개를 진상하라고 명령한다. 갖은 폭정과 사치향락을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이듬해인 연산군 12년(1506년) 9월 2일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폐위된다. 

가체를 둘러싼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이듬해인 연산군 12년(1506년) 9월 2일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인해 끝난다. 연산군이 폐위된지 3일이 지난 9월 5일. 새로운 왕 중종은 전국에 명을 내려 연산군 시절 사치향락의 원흉인 다리(首髢)의 진상을 멈추게 한다. 아울러, 중종은 이미 모아둔 다리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어명도 내린다. 

 

공납의 폐단과 관리들의 부정축재 수단 

연산군의 폐위에 따라 백성들의 가체에 대한 고충은 끝났을까? 중종 16년(1521년) 3월 10일, 제주목사 이운(李耘)은 제주도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수체(首髢,가체)를 다른 곳으로 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공납문제는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잘 해결되지 못한 모양이다. 그 후, 명종 8년(1553년) 5월 29일 제주 백성 고윤호 등은 상소를 통해 가체 공납에 대한 고충을 호소하였다. 연이은 흉년과 왜구의 습격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 있는데, 다리(髢)를 바치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또한, 머리털은 한 번 깎은 후, 4~5년 동안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기준 길이의 다리(髢)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주도민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공물을 제주가 아닌 육지에서 받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는 이 상소에 대해 거부의견을 상신했지만, 명종은 2년 정도 감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종의 이러한 배려에 대해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적었다. “제주도는 지금 흉년과 왜구의 노략질로 인해 힘든 상황인데, 어찌 한낮 부인네들의 머리장식인 다리 때문에 백성들을 힘들게 할 수 있는가? 제주백성의 상소에 대해 임금께서 특별히 다리 공물을 일시적으로 감면해 주신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영구적인 폐지를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사관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다리 공물을 영구히 폐지하지 못했던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경종 2년(1722년)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지 300년이 지났건만 가체에 대한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것 같다. 이번에는 전 함경감사 윤헌주가 진상품인 가체의 수량을 함부로 조작하여 백성들을 수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공물을 미처 납부하지 못한 고을에 대해서는 가체 1병(柄)의 가격을 억지로 4승포 30필로 징수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물가 변동을 무시한다는 가정하에 면포 1필의 가치는 쌀 5말 정도라고 한다[4]. 윤헌주가 징수한 가체 1 병(柄)은 쌀 150말(1200Kg), 즉 8.3석에 해당한다(쌀 1석=144Kg, 18말).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20Kg 쌀의 상등품 기준 도매가는 약 4만7000원, 소매가는 약 5만1000원 정도이다. 따라서, 20Kg 쌀의 가격을 대략 5만원으로 가정하면, 1Kg당 가격은 2500원 정도이다. 따라서, 윤헌주가 징수한 가체 1병의 가격은 현재 가치로 300만원 정도이다. 그런데, 큰 고을의 경우, 40병(柄)을 징수하였으니 현재 가치로는 1억 2000만원에 해당한다. 함경도의 많은 고을에서 매년 수 천만원씩 수탈한 셈이니 상당한 부정축재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영조 11년(1735년) 6월 18일에는 전 북병사(함경도 병마절도사) 홍호인이 뇌물로 가체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가체는 세금과 뇌물을 통해 탐관오리의 부정축재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가체로 인한 부부싸움이 살인을 부르다. 

일성록 정조편에는 가체로 인한 부부싸움으로 남편이 아내를 살인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14년(1790년) 함경감사 이문원(李文源)은 함경도 내 살인사건 4건에 대해 정조에게 보고하면서 부부싸움으로 아내를 죽인 최관악(崔觀岳)의 옥사에 대해 보고한다. 어느 날, 함경도 온성에 사는 최관악은 아내의 가체 2개를 부레풀(魚膠, 어교, 오늘날의 아교에 해당)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에 화가 난 아내가 남편을 원망하여 심한 욕설을 하고, 심지어 부레풀로 남편의 얼굴을 마구 때리니 화가 난 남편이 몽둥이로 아내를 때려 죽인 것이다. 아내를 죽인 사실에 겁이 난 최관악은 아내가 자살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조사 결과 이내 그의 살인죄가 명백하게 밝혀진다. 이에 따라 함경감사 이문원은 그를 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정조의 판단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정조는 가체란 여인들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특히 함경도와 같은 북쪽 사람들은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고 말하였다. 최관악이 가체를 부레풀로 바꾸어서 그의 아내가 매우 분개하여 심한 욕설과 함께 남편을 구타하였고, 이에 남편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내를 때렸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남편의 편을 들어준다. 정조의 생각으로는 부부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인데, 이로 인해 남편을 무거운 죄로 처벌한다면 죽은 아내가 슬퍼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죽은 아내가 슬퍼할 것이라는 논리는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공주 길례를 위한 연산군의 가체 진상 명령(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1502년) 1월 14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주 길례를 위한 연산군의 가체 진상 명령(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1502년) 1월 14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중종반정에 따른 가체 진상의 폐지 명령 (중종실록, 중종 1년(1506년) 9월 5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중종반정에 따른 가체 진상의 폐지 명령 (중종실록, 중종 1년(1506년) 9월 5일). ⓒ디지털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최관악의 살인사건을 현재의 형법으로 본다면 어떨까? 2016년 일부개정된 형법 제259조 상해치사에 따르면, 사람의 신체를 상해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한 상해치사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한다. 즉, 직계존속에 대한 상해치사는 일반 사건에 비해 더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형법 제264조에 의하면, 상해치사 사건에서 상습범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처벌의 50%까지 가중 처벌할 수 있다고 한다. 최관악의 아내 폭행이 상습적인 행동이었는지도 한 번 살펴보아야 했을 것 같다. 물론, 형법 제267조에서는 과실로 인한 살인죄는 2년 이하의 금고와 7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그 처벌이 경감되지만, 몽둥이로 아내를 때려죽인 그의 행동이 과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REFERENCES 

[1] 강문종, 문화재청 소식지(문화재사랑, 2021 년 8월 31일) https://www.cha.go.kr/cop/bbs/ 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kmZq4rMrsU 9MSlRH2cYhubC11Hz26x5JJMYNQJuj5hmR4s 2JpFGvrmD2b0LRB0TO.cha-was02_servlet_en gine1?nttId=80332&bbsId=BBSMSTR_1008&pa geUnit=0&searchtitle=&searchcont=&searchke 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 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 Dt=&mn=NS_01_09_01 

[2] 한국민속대백과사전(국립민속박물관) https:// folkency.nfm.go.kr/topic/detail/6830 

[3] 조선왕실 왕비와 후궁의 생활, 국립고궁박물 관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2013) https://www.cha. 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97 90&bbsId=BBSMSTR_1021&pageUnit=10&sear chCnd=tc&searchWrd=&ctgryLrcls=&ctgryMd 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se archUseYn=Y&mn=NS_03_08_01 

[4]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 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 elId=tg_003_0210&ganada=&pageUni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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