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조선의 헤메스선생님 '수모(首母)'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이준배,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장(이사)

 

2022년 통계청의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2012년 32만7100건에 달하던 혼인건수가 2022년에는 19만1700건으로 감소했다. 또한, 인구 1000명 당 혼인건수를 의미하는 조(粗)혼인율 역시 2012년 6.5건에서 2022년 3.7건으로 감소했다. 이 두 가지 통계지표를 통해 최근의 혼인건수 감소를 실감할 수 있다. 한편, 조선일보 2023년 2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결혼인구는 줄고 있지만 프리미엄 웨딩 시장 규모는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장의 성장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 ‘웨딩플래너(Wedding planner)’라고 불리는 컨설턴트들의 역할도 있다고 생각된다. 웨딩플래너는 예비 신랑신부들에게 결혼식과 관련된 부족한 정보를 채워주거나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신 준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직업은 바쁜 현대사회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웨딩플래너들이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수모(首母)라고 불리던 조선의 웨딩플래너를 소개하고자 한다. 

수모(首母)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머리장식을 돌보아주었던 전문직 여성들로 수식모(首飾母), 여쾌(女僧) 또는 장파(粧婆)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원래 여인들의 머리장식을 전담하던 사람들로 처음부터 웨딩플래너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모(首母)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연산군 3년(1497년) 2월 28일이다. 연산군은 각 관청의 비자(婢子, 여자 종) 중 14~15세로 자색(姿色, 고운 얼굴)이 있는 사람들을 10명 골라 수모(首母)에게 맡기고, 이들에게 그 일을 전습시켜 궁중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1497년) 2월 28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1497년) 2월 28일)

중종 23년(1528년) 7월 2일, 사간원(司諫院)에서는 형조(刑曹)가 부정한 방법으로 수식모(首飾母)를 정원보다 더 많이 뽑았다고 간언하였다. 이에 중종은 수식모(首飾母) 선발과 관련하여 중궁전의 서류는 보았지만, 형조의 서류는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 문제에 대해 중궁전에 물어보라고 하였다. 이 때,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형조가 수식모(首飾母)를 뽑으면서 중궁전에는 보고를 하고, 임금에게는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머리치장을 하는 수식모(首飾母)를 왜 형조에서 뽑았는지 조금 이해하기 힘들지만, 부정한 방법이 동원된 것으로 보아 형조에서 무슨 특수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선시대 결혼식에서 수모(首母)의 역할이 꽤 중요했다는 것은 중종 36년(1541년) 12월 29일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날 실록에서는 ‘혼인 때 사치를 금단하는 규정’이 나온다. 당시 신부가 시부모를 처음 뵐 적에 청홍금선삼(靑紅金線衫, 푸르고 붉은 천에 금선을 넣어서 만든 화려한 옷)을 입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가난한 백성들은 이를 구하지 못해 많은 폐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각자 형편에 맞는 예복을 입도록 하고, 특히, 문제의 청홍금 선삼은 아예 금지시켰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혼가(婚家, 신부의 집)는 물론 수모(首母) 또한 처벌한다고 명시했다. 이 처벌규정을 통해 머리장식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수모(首母)의 역할이 고가의 예복 선정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식에서 수모(首母)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반증이다.

1979년 지금의 과천 서울대공원 부지를 조성하면서 이장한 광주이씨 선산묘지 중 이집일(李執一, 1574~1613)의 부인 청주한씨 묘에서 출토된 금선삼. 청주한씨 부인은 중종의 2녀 의혜공주(1521~1564)의 손녀로 이집일과 혼인한지 얼마안되어 사망했다. 당대최고 가문 출신답게 출토된 금선삼 역시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1979년 지금의 과천 서울대공원 부지를 조성하면서 이장한 광주이씨 선산묘지 중 이집일(李執一, 1574~1613)의 부인 청주한씨 묘에서 출토된 금선삼. 청주한씨 부인은 중종의 2녀 의혜공주(1521~1564)의 손녀로 이집일과 혼인한지 얼마안되어 사망했다. 당대최고 가문 출신답게 출토된 금선삼 역시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같은 날 실록에서는 다음의 내용이 이어진다. 사대부의 혼인 때 유모(乳母)나 유모의 남편, 문안노비(사돈관계에서 서로 소식을 보내기 위해 사용한 노비)나 신노비(혼인시 부모가 선물로 준 노비) 등에게는 작더라도 절대 선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 또한, 수모(首母)에게는 선물을 주는 것이 예에 마땅하지만, 너무 화려한 사라능단, 초견, 명주는 안되고 간단하게 면포 정도는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다. 만일 이 법을 어긴다면, 신랑과 신부 집안의 가장(家長)을 중죄로 처벌하고, 거기에 더해 선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유모(乳母)보다 수모(首母)의 위상이 높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모(乳母)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인천대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이승원은 2015년 1월 9일 문화재청 소식지인 문화재사랑에 ‘상류집안의 상징, 유모’라는 글을 소개했다. 이승원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유모(乳母)는 엄마 대신 젖을 먹여주는 단순한 젖어미가 아니었다. 유모(乳母)에 의한 양육은 상류계급의 풍습이자 문화였다. 유모(乳母)는 신분, 가정환경, 건강상태, 게다가 인품까지 고려하여 뽑을 정도였으니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실의 유모는 그 자식이나 남편에 대해서는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일종의 벌금)을 면제하고, 심지어 면천(免賤, 노비가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까지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유모(乳母)에게 주는 결혼식 선물은 불법이고, 결혼식 때에만 잠깐 도움을 주는 수모(首母)에게 주는 선물은 괜찮다고 하니 당시 수모(首母)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11년(1633년) 6월 13일
승정원일기, 인조 11년(1633년) 6월 13일

수모(首母)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인조 11년 (1633년) 6월 13일 실록에 다시 나온다. 이 날 박지계(朴知誡, 1573~1635)는 당대의 폐단들과 이에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인조에게 밝힌다. 그 중 수령이 간사한 아전을 대하는 것이 마치 신부가 수모(首母)를 대하는 것처럼 후하다고 하면서 이로 인해 간사한 아전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이 끝이 없다는 한탄을 하였다. 비록 비유의 표현이지만, 그 내용은 수모(首母)와 예비 신부와의 불평등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시 신부가 처음 시댁에 갈 때에는 반드시 수모(首母)를 동행하여 단장을 하고, 그 후에 예를 행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 입장에서 수모(首母)가 해 주는 단장은 가히 절대적인 셈이다. 따라서, 예비신부들은 수모(首母)에 대해 한없이 후하게 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경희, 조선후기 여성장인의 장색(匠色)과 직역(職役) 연구 -의궤(儀軌)의 분석을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한국여성사학회, vol. 20, 96-138(2014).
ⓒ장경희, 조선후기 여성장인의 장색(匠色)과 직역(職役) 연구 -의궤(儀軌)의 분석을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한국여성사학회, vol. 20, 96-138(2014).

조선시대 수모(首母)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왕실의 중요 행사 중 책례(冊禮, 책봉식)와 가례(嘉禮, 결혼식)는 그 격식과 위엄을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화려한 의복과 머리치장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특히, 머리치장은 일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체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분야 전문가인 수모(首母)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수모(首母)들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왕실행사 기록서인 ‘책례도감’과 ‘가례도감’에는 이들 수모(首母)들의 이름이 당당히 등재되었다. 엄격한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여인의 이름이 국가 공식기록에 등재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1645년부터 1744년까지 왕실의 각종 책례와 가례에 참가한 수모(首母)는 모두 127명이다. 작게는 3명부터 많게는 17명까지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己香(기향)은 1651년, 1661년, 그리고 1677년 3번의 참여기록이 있다. 무려 26년동안 왕실행사에 참가한 것이다. 또한, 善業(선업)은 1677년, 1690년, 1694년, 그리고 1696년 4번이나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활발했던 수모(首母)의 왕실행사 참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1788년(정조 12년) 가체 사용을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 반포되면서 가체는 공식적인 왕실행사에서 사라진다.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에 따르면, 가체사용이 금지된 이후 수모(首母)들은 결혼식에서 일시적으로 허용된 족두리 등 꾸미개들을 만들고, 이를 대여하는 것으로 업(業)을 바꾸었다고 한다. 정조의 가체금지 정책에 따라 수모(首母)들의 사업모델이 서비스업에서 대여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그림인 평생도의 혼인식 장면 중 일부. 수모(首母)로 보이는 여인이 신랑과 신부 사이에서 걸어가는 것을볼 수 있다.ⓒ평생도(平生圖), 작가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그림인 평생도의 혼인식 장면 중 일부. 수모(首母)로 보이는 여인이 신랑과 신부 사이에서 걸어가는 것을볼 수 있다.ⓒ평생도(平生圖), 작가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결혼식의 사치풍조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로 유명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제자인 이병휴(李秉休, 1710~1776)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치풍조 철폐를 위해 검소한 결혼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종손(從孫)인 이철환(1722~1779)의 딸 혼사를 걱정하며 검소한 결혼식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이를 규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시골에 사는 신부가 결혼식을 위해 옷과 머리장식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서울의 장파(粧婆, 수모(首母))를 불러오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결혼식의 사치를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은 옛날 제도를 모방하여 하나의 올바른 격식을 만들고 모든 사대부들이 이를 공통으로 이용한다면 지금과 같은 사치의 폐단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누군가 화려하게 결혼식을 치른다면 점점 더 경쟁이 되어 성대해질 것이고,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니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수모(首母)에 대한 신문 기사 ⓒ매일신보 1914년 1월 25일
일제강점기 수모(首母)에 대한 신문 기사 ⓒ매일신보 1914년 1월 25일

조선시대 작품인 ‘평생도’ 중 결혼식 장면을 보면, 말을 타고 가는 신랑과 신부 곁에서 수모(首母)로 보이는 여인이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수모(首母)는 대담하게도 신랑 친구들 무리와 함께 대등한 위치에서 걸어가고 있다. 또한, 수모(首母)의 가체는 주위에서 구경하는 다른 여성들보다 크고 화려하기까지 하고, 입술 역시 굉장히 붉은 색으로 화장한 모습이 보인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만큼 수모(首母) 자신도 상당히 치장을 한 것이다. 수모(首母)의 오른편에 있는 바구니는 아마도 결혼식에서 신부에게 필요한 물품들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00년 간행한 시문집인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에서도 수모(首母)의 또 다른 이름인 장파(粧婆)에 대한 내용이 소개된다. 여기에서도 장파(粧婆)는 결혼식을 위한 의복을 꾸미고, 머리장식까지 만질 수 있는 일종의 전문가 집단이라고 소개되었다. 

수모(首母)의 활약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이어진다. 1914년 1월 25일 매일신보에서는 ‘여자의 직업, 수모’라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수모(首母)는 여성들의 인기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수모(首母)가 되는 과정 또한 녹록하지 않았다. 수모(首母)가 되려면 우선 늙은 수모(首母)의 제자가 되어 여러 해 동안 배워야 했다. 당시 수모(首母)를 양성하는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도제식 교육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한, 집집마다 예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수입도 제법 좋아서 큰 집안의 혼례를 한 번 담당하게 되면 한 달 생활비를 벌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입소문이 나서 인기를 얻게 되면 평생의 직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성공한 수모(首母)들에게도 한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인의 수입에 기대어 놀고먹는 남편들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소위 ‘셔터맨’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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