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경 조각가와 뮤지엄의 만남,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전

[더케이뷰티사이언스]  코리아나미술관이 올해 스페이스 씨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신미경 조각가의 기획초대전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을 오는 3월 3일부터 6월 10일까지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코리아나미술관&코리아나 화장박물관에서 전시한다. 미술관과 작가가 1년이 넘는 시간 함께 조율하며 전시를 준비했다.

‘시간’과 ‘물질’은 신미경 작가의 작업과 뮤지엄(museum)을 관통하는 주요 개념으로, 전시에서 뮤지엄 공간은 작품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물질적 실체이자 다차원의 시간과 물질이 공존하는 다층적 구조로 작동한다. 즉,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뮤지엄의 공간에 스페이스 씨의 소장품과 신미경 작가의 작업이 함께 어우러져 다층적인 구조를 만들어 선보인다. 신미경 작가의 작품 모두 120여 점 및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인 70점이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미경 작가의 신작이다.

1996년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에 처음 방문하여 그리스 고전 조각상을 보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번역 시리즈’를 시작으로 신미경은 지난 30년 가까이 서양의 고전 조각상이나 동양의 도자기 등 문화적 유산을 ‘비누’라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재료를 통해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쉽게 마모되고, 녹아 사라지는 재료인 비누는 작가가 탐구하는 시간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로 오랜 시간 활용되어 왔다. 어떤 사물의 시간성과 기능성이 정지된 채 뮤지올로지(museology) 안에서 유물이 되는 과정은 비누의 본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 작품으로서 권위를 획득하고, 전시되는 신미경의 작품과 맞닿아있다.

미술관의 첫 번째 전시실에 전시된 신작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는 조각가 신미경이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페인팅 시리즈’의 확장판으로, 회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제작방식과 그 물질성은 조각에 가깝다. 한마디로 ‘회화처럼 보이는 조각’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로 치면 150호 정도되는 대형 철제 틀을 만들어 각 작품당 0.1톤이 넘는 비누를 녹여 색과 향을 더하고, 틀 안에 부어 굳히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표면을 다듬어 토치의 불로 색을 조정하는 등 밀도 높은 작업 과정을 통해 5점의 ‘라지 페인팅 시리즈’를 완성했다. 작품 하나당 200kg가 넘는 육중한 무게인데, 그 안에는 작가의 노동과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마다 다른 표면의 질감과 물질성을 느낄 수 있으며, 전시실을 가득 채운 작업의 비누향은 관람객의 후각을 자극한다.

신미경 작가
신미경 작가

마치 유럽의 한 뮤지엄 전시실에 온 것 같은 분위기의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코리아나미술관의 소장품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신미경의 신작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2023)를 만나볼 수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두 점의 입상 조각이 관람객을 맞이하는데, ‘번역 시리즈(Translation Series)’의 초창기 작업으로 그 중 1998년작 ‘트랜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은 신미경이 런던에서 대학원 졸업 후 헤이워드갤러리(Hayward Gallery) 기획전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자 2004년 브리티시 뮤지엄에서의 퍼포먼스에도 활용되었던 작품으로, 현재는 비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자체가 하나의 고전작품처럼 ‘유물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전시실 벽면에는 2014년부터 작가가 골동품 액자 프레임을 수집해 복원하고 그림이 있던 자리를 비누로 채워 만든 ‘페인팅 시리즈’(2014~2023)가 코리아나미술관의 서양화 컬렉션 및 소장 조각과 함께 서로 교차하며 전시되어 있다.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전시전경
신미경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신미경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전시는 5-6층에 위치한 화장박물관의 상설전시실로 이어진다. 5층 박물관 전시실 중앙에는 빛이 나오는 대형 좌대 위, 색색의 도자기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페르시안 유리공예품 같은 모습을 띠지만, 사실은 투명비누로 도자기를 캐스팅해 속을 파내고, 최소한의 형태만을 남겨 투명함을 강조한 신미경의 ‘고스트 시리즈’(2007~2013)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브제의 역사적 맥락과 정보는 소멸되고,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비누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한편,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된 동경(청동거울)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장에는 신미경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다. 비누로 만든 도자기에 은박, 동박을 입혀 마치 몇 백 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오래된 유물의 모습을 재현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는 실제 유물인 동경과 서로를 비추듯 여러 층위의 시간과 물질을 교차시킨다.

6층 박물관 전시실에는 신미경의 지난 ‘풍화 프로젝트’와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변형된 모습의 인물상이나 불상 등의 조각을 다시 브론즈로 캐스팅해 번역한 신작이 선보여진다. 여기서 조각상들은 비누가 지니는 가변성은 사라진 채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이 박제되듯 정지된 모습인데, 브론즈로는 얻어낼 수 없는 형태의 소멸과 질료의 흔적이 더해져 관람자로 하여금 그 작품의 시간의 흔적을 역추적하게 하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신미경 '트렌스레이션' 그리스 조각상
신미경 '트렌스레이션' 그리스 조각상
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유물(동경)과 신미경,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유물(동경)과 신미경,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3' 코리아나미술관 화장실 설치전경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3' 코리아나미술관 화장실 설치전경

최근 5개월 간, 시내 한 백화점의 화장실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변형된 모습의 화장실 프로젝트 조각상 6점 또한 그 본래의 쓰임이 멈춰진 채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에 설치되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조각된 여인조각상의 머리는 사람들의 쓰임에 의해 매끈한 타원형의 형태로 변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신미경의 ‘화장실 프로젝트(Toilet Project)’(2004~)에 대해 “정교한 비누 조각상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구(球)체로 바뀌는 과정은 모더니즘 예술이 어떻게 뮤지엄을 차용해 번역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이번 전시기간 새롭게 진행되는 ‘화장실 프로젝트’(2023) 비누 조각상 4점은 지하 1층과 지상 5층의 남녀화장실에 각각 설치되어 전시를 찾는 이들에게 ‘작품을 손으로 만지고, 심지어 변형시키는’ 짜릿한 촉각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전시장 안에서는 만질 수 없는 신미경의 비누조각을 유일하게 마음껏 만져보며 비누의 본래 기능으로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시기간 관람객들에 의해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마모되어 가는 ‘되어감’의 과정 자체가 예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신작의 작업과정과 설치 과정 등이 신미경 작가의 인터뷰와 함께 담긴 영상이 전시장 내 상영된다. 3월 2일(목) 오후 6시에 개막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며, 3월 11일(토) 오후 3시부터는 미학자 강수미와 신미경 작가가 함께하는 아티스트 토크가 개최된다. 자세한 내용은 스페이스 씨 홈페이지(www.spacec.c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코리아나화장품 창업자 송파 유상옥(松坡 兪相玉) 회장은 지난 50여 년간 애정을 가지고 수집한 유물과 미술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2003년 서울 신사동에 스페이스 씨를 설립했다. 고 정기용 건축가(1945~2011)가 설계한 스페이스 씨 건물에는 설립 취지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따라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와 유물을 다루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5~6층에, ‘신체’, ‘여성’, ‘아름다움’ 등을 주제로 동시대 미술을 선보이는 코리아나미술관이 지하 1~2층에 위치하고 있다.

관람시간 화~금 오전 11시~오후 6시, 토 오후 12~6시(매주 일, 월 휴관)

관람요금 성인 6000원, 학생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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