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최대도시 호치민시 ⓒhttps://cnntravel.tistory.co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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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케이뷰티사이언스] 베트남 현대사는 전쟁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념과 정치적 혼란속에서 민족주의 독립을 위한 베트남의 독립 투쟁이 지금의 베트남을 만들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주요 도시마다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전쟁 기념관’이다. 이곳에는 베트남 민족의 독립을 위해 베트남군이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이 전쟁에 적군으로 참전한 국가들이 행한 일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호치민시의 ‘호치민 전쟁 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보았던 월남전에 대한 기록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미국이나 한국의 입장에서 보던 영웅적인 이야기나 블록버스터의 화려함이 아니라 죽음과 아픔이라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월남전에서 무기와 전력에서 열세였던 베트공들은 숲에서 게릴라 전으로 대응했는데, 이러한 월맹군을 공격하기 위해 숲의 나무를 없애는데 사용된 에이전트 오렌지와 같은 고엽제는 인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고엽제의 피해는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유전되고 있어 지금도 고엽제 피해자들은 고통속에서 지내고 있다. 월남전 당시 약 400만명의 베트남 사람이 고엽제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 약 2만5000여 명도 고엽제 피해자로 알려졌다.

당시 한국군은 국가안보와 국제적인 원조가 필요한 상황 등으로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월남전을 통해 한국의 국가 경제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1964년 200명을 시작으로 다음해인 1965년에는 20,620명, 1966년 25,570명, 1967년 47,830명, 1968년 50,000명, 1970년 48,540명, 1971년 45,700명, 1972년 36,790명으로 총 275,250명이 참전하였다.

호치민시에 위치한 호치민 전쟁 기념관 자료
호치민시에 위치한 호치민 전쟁 기념관 자료

월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성과를 냈다. 이는 아군 입장에서의 평가이다. 적군 입장에서는 동료를 많이 죽인 적이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시 발생한 전투중에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 때 피해를 입었다는 베트남 사람들은 그 아픔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한국군 증오비'를 세웠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K-POP과 K-드라마를 좋아하는 베트남 젊은이들이 많고, 한국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많아진 최근의 모습에서 이러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베트남은 가슴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 단지 잊혀진 듯 지내고 있을뿐이다.

한국군 증오비 ⓒhttps://www.nocutnews.co.kr/news/4877062
한국군 증오비 ⓒhttps://www.nocutnews.co.kr/news/4877062

1955년 시작된 월남전은 1975년 월맹군의 베트남 통일로 끝나게 된다. 한국은 3년간의 한국전쟁만으로도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는데, 베트남은 20년간 전쟁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경제와 국민의 삶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였다. 이러한 어려운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1975년 4월 30일 통일 후 경제개발 계획이 시행되었지만 남부 베트남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로 통합하기 위한 집단농장을 통한 자급자족, 자본주의 상업활동 전면 중지 등의 정책은 주민들의 호응부족과 계속된 가뭄으로 실패하였다. 또한 서방 국가의 원조 중단과 미국의 무역 봉쇄 정책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고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혁, 개방을 모색하던 중 외국 자본 유치로 빠르게 성장하는 이웃나라 태국과 중국의 개방 정책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를 참고로 한 베트남식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Doi Moi)'가 1986년 채택되었다. 도이머이는 '새롭게 바꾼다'라는 의미이다.

도이머이 정책은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며 베트남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농업 분야로 1988년 토지법을 공포하여 국가가 소유했던 토지를 농민 개인에게 나눠주면서 농업생산력 향상에 기여했다. 1988년 1,950만톤이던 농작물 생산량이 1989년 2,150만톤, 1992년에는 2410톤으로 증가하였다.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생활 향상은 도이머이 정책 성공의 핵심 요인이였다. 전쟁 직후 해외의 원조가 없으면 자급자족이 되지 않던 베트남은 이제는 세계 2위 쌀 수출국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 경기가 하락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트남은 외국인 투자를 기반으로한 해외수출, 성장하는 내수 시장 등으로 2022년 8.02%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최근 10년간 최고 성장률이다. 이러한 탄탄한 경제 성장을 이룰수 있도록 배경은 1986년부터 2005년까지 20년간 시행한 도이머이 정책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경제 성장률 ⓒVnExpress
베트남 경제 성장률 ⓒVnExpress

베트남은 2021년 기준 1인당 GDP 3,694달러로 대한민국의 1인당 GDP 34,984달러의 약 10분의 1 수준이다. 이러한 통계적 평균 때문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을 오해하곤 한다. 베트남 평균은 10분의 1이지만 베트남 주요 도시 사람들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자신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골프와 해외여행을 즐기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은 해외 면세점에서 화장품이나 소비재를 구입하고, 애플의 아이폰, LG전자의 스타일러를 구매해 사용한다. 베트남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평균적 이해가 아닌 모자이크와 같이 각 도시별, 계층별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분석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장을 세분화하고 타깃 고객을 정확히 나눌수 있어야 베트남 시장 진출에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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